한줄 詩

봄날 이력서 - 서화성

마루안 2022. 5. 2. 21:53

 

 

봄날 이력서 - 서화성

 

 

봄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내 고향은 어느 먼지가 뿌연 두메산골인지

무소식을 짊어진 우체부가 사라지는 어느 골목길인지

서너 달 걸려 소독차 꽁무니를 쫓아갔던 그날부터일까

아래 이장집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저녁 무렵인지

고구마를 굽는다며 얼굴까지 타버린 그날인지

막차가 떠난 밤길을 걸어서 왔던 어느 논두렁인지

건넛마을에 마실 간 엄마가 돌아왔던 달빛부터일까

까까머리에 가슴을 움켜쥐고 여학교를 지나갔던 시절인지

모캣불을 피우며 떨리던 손을 잡았던 그날인지

읍내 제일 큰 빵집에서 미팅한 오월부터 시작일까

이브 날에 걸었던 어느 키가 커버린 철둑길인지

코스모스가 뜬눈으로 설레게 한 어느 가을날인지

밤새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첫눈이 내린 산동네인지

답장을 기다리며 꾹꾹 눌러 쓴 밤편지인지

어디쯤에서 봄날은 시작했을까

내려오다가 달빛에 상처나 입지 않았을까

 

 

*시집/ 사랑이 가끔 나를 애인이라고 부른다/ 푸른사상

 

 

 

 

 

 

여기, 고성 - 서화성

 

 

콩나물시루처럼 고성차부,

판곡리행 버스는 신처럼 버티고 있었다

오 분 빠른 시간이 출발이라며

쓰레빠를 끌던 기사는 지루했는지

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포개어 마신다

그것마저 아쉬웠는지

구겨진 담배를 피웠다 말기를 반복이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때는 대낮에 별이 초롱초롱했었는데

대학생 큰형 살림 밑천인 암송아지 걱정이었다

 

박 씨는 다라이를 무기 삼아 자리를 잡는다

도다리 몇 마리와 병어 두어 마리

단물이 빠진 껌을 쩝쩝 씹으며

아가씨가 되어버린 동창생 영자

큰돈을 벌어오겠다며 야반도주한 영자

큰 감투를 쓴 것처럼

오라이, 오라이

 

기사는 영자 말에 복종하는 순응주의자였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반값에 퉁치기도 했다

그러면 히죽히죽 웃거나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곤 했다

오라이, 오라이

 

초인종 벨은 이미 망가지고 없었으며

차 문을 부서지게 치고서 시동을 걸었던 버스,

기사는 몇 발짝 지나서 멈추기도 했다

흙먼지에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저만치서 누렁이가 달려왔다

어제 빤 교복은 붉은 노을이 와서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오라이, 오라이

 

 

 

 

*시인의 말

 

내기 시를 쓰는 이유는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