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 배한봉 옥상에 상자 텃밭을 만들었다. 밑거름을 넣고 상추며 들깨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준 것 뿐인데 어느 새 잎이 손바닥 만해졌다. 한 잎씩 채소를 거둬들이는데 푸릇푸릇 콧노래가 실실 새 나왔다. 부자가 이런 것이라면, 삿된 생각 한 점 들지 않고 그저 옥상에 동동 떠다니는 실없는 웃음을 데려와 웃거름으로 얹어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라면 나는 엉뚱한 곳을 오래 기웃거린 것이다. 아하, 웃음이라는 배의 조그마한 항구 금은보화 싣고 출렁이는 볼록한 종이가방에서 푸른빛 환하게 흘러나오는 시간과 싱긋싱긋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내 이마에 걸리는 초여름 건들바람이 수확한 상추, 깻잎 쌈밥만큼 달달했다. *시집/ 육탁/ 여우난골 꽃 심는 사람 - ..

한줄 詩 2022.05.26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세상의 쓴맛은 한밤중 더듬어 찾은 젖꼭지로부터다 젖을 떼기 위해 발라 놓은 마이신을 맛본 뒤 일찍이 우는 법을 터득하고 손가락을 빨았다 허기의 힘으로 마루 끝을 벗어나 극을 향해 신발코를 찧어 대며 대문을 나서니 딴 세상이었다 손끝으로 담배를 쥐고 피우는 패거리들과 용두사미가 되어 몰려다닌 시장, 귀퉁이에서 꼬리지느러미를 칼날로 내리치는 여자가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나는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다 용의 꼬리로 사느니 뱀의 머리가 되리라 연필심을 깎으며 코피를 쏟았다 허공의 멱을 따는 칼끝과 가난한 꽁무니를 따라 걷다 보면 소주, 변리, 씀바귀, 이별,,,,, 끝에서 첫 번째 골목이 나오곤 했지만 나는 마이신보다 쓴맛은 찾지 못했다 죽을 만큼 쓰디쓴 그 끄트머리에서 꽃은 피고,..

한줄 詩 2022.05.26

봄이 잖아, 고개 들어 - 황현중

봄이 잖아, 고개 들어 - 황현중 괜히 부끄럽고 덜컥 겁이 나고 그렇다 담장 밑 초록을 보면 새로 시작하는 싱싱한 것들을 보면 시들어 가는 내 얼굴을 보면 한숨처럼 꺼져 가는 감탄사 몇 개로 봄이 오는 골목 닦아 보지만 되돌아보니 회색빛, 하늘 온통 누렇다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황사가 주범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제 맑은 날 돌아오지 않는단다 여기저기 뒤적거려 봄소식 수소문해도 친구 장례식 때 입었던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가 목을 매고 있을 뿐 목이 메일 뿐 몇 달째 삭은 이빨 빼내고 새 뿌리 박고 있다 서른두 개 이빨 중 내 것은 거의 없다 죽은 뿌리에서 꽃대 올라 올 리 없는데 이게 웬일인가 입안의 통증이 자꾸 붉은 꽃 토해낸다 꽃가루가 온몸 간지럽힌다 부끄럽다 고목나무 발치에서 웅성웅성 키 세우며 기어..

한줄 詩 2022.05.26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 장시우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 장시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음악은 내 머리 위에 앉아 낯빛을 살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내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끼어들 수 없는 이야기에 끼어든 낯선 얼굴이 있다 멋진 밤이니 촛불을 켜고 인터뷰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어쩌자고 비 오는 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거울에 떠올랐습니까 당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떻게 당신과 당신 주위의 것들을 데려왔을까 빗소리가 부풀어 오르자 당신은 지워지고 플루트에 숨 불어 넣는 소리가 들린다 악보 어디쯤 쉼표로 있는 걸까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은 뭐라구요 덜컹대는 음표 사이 큰 숨을 불어 넣는 저 쉼표는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까 어쩌다 보니 낯선 일투성이다 내 고양이가 밥 달라고 깨우지 않은 일도..

한줄 詩 2022.05.23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새벽에 널 안아 주고 오길 잘했다 거친 열대의 밤이 흘러갔다는 것을 내 몸에 무수히 박힌 숨구멍의 눈들이 모두 목격했다 오후의 깃발을 구청 공무원이 거둬 갔는지 바코드의 바람은 물컹해졌다 최신 가요와 술병이 나사처럼 조여진 유흥가의 흥취는 밝아 왔고 무연분묘의 헝클어진 뗏장처럼 네온사인이 뒷골목에 투숙했다 꿈이 없어 음악이나 하고 싶다고 노래방 주인은 흥얼거리며 빈 맥주병 박스를 쌓는다 경계 밖에선 누구나 무모함의 주먹을 쥐고 흔들었으나, 간절함이 사라진 거리에 이내 세금이 매겨지고 감시 카메라의 눈알이 불거졌다 첨벙대던 약속들, 그 불발의 결과물이 모여서 바코드 숲이 바람에 나부꼈다 애초에 약속 같은 건 없었고, 때 묻은 절망이 희망을 곁눈질하는 사이 노래가 없었다..

한줄 詩 2022.05.22

불시착 - 최백규

불시착 - 최백규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백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 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한줄 詩 2022.05.22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야적장 철근을 옮긴다 이것도 한때는 흐르는 물이었을 거라 먼 시간 저도 모르게 흘러와 쌓이고 굳었지만 물결이었을 때를 기억하느라 휘청거린다 현장에선 고요한 명산은 필요 없다 쓰임새에 맞으면 죽어서도 살아 있다 산 자의 근육처럼 일렁이는 철근 그림자 장비에 얹히는 철근 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 굽히며 겸손해진다 탄력과 반동에 익숙해진 습성 마치 저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한없이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은 대체로 패배나 열등이다 자본주의 장점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나절 휘청거리는 철근 몇 다발 옮겼을 뿐인데 한생이 다 흐른 듯 마음이 헐거워진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한줄 詩 2022.05.21

내 생의 북쪽 - 김용태

내 생의 북쪽 - 김용태 싸리꽃 피었다, 졌다 봄이 갔다는 거다, 불쑥 다녀간 것이 계절만은 아니어서 그 아래 한 마리 나비, 환한 주검 펼쳐져 검은 상복 갖춰 입은 개미 행렬에 장엄히 실려 가고 있다 한철도 못 되는 생이지만 죽음이라 하면 저쯤은 되어야지, 혈육도 아닌 것을 쪼그리고 앉아 내 생의 북쪽을 가만히 들여다본 그런 날이 있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주검을 들추다가 - 김용태 채 육탈(肉脫) 되지 않은 주검 들추자 보기 흉한 것들 밥알처럼 매달려 어둠속에서 곡진한 조문, 바라보는 가슴 아리다 슬픔도 넘치면 때로는 소리를 잃는 것인지 곡(哭) 없이 마른 울음 삼키는 저들과, 죽어 허망한 것은 살아 무슨 인연이었길래 마지막 육즙(肉汁)마저 알뜰히 젖을 물리고 종래 터럭 하..

한줄 詩 2022.05.21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

한줄 詩 2022.05.19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저 푸른 가지 끝에 등불 하나 달려 있다 그 불빛 아래 서성이는 거인의 목같이 긴 기다림의 목덜미가 욕망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있다 운명은, 어느 날은 서쪽으로 목이 기울고 어느 날은 동쪽 가지 끝에 매달려 그 성문 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 나를 판화 한다 오늘 이 순간, 동쪽으로 가는 문 활짝 열어 줄 거인은 누구인가 수성 성씨를 가진 물줄기의 기운으로 둥근 해를 건져 올릴 귀인은 누구인가 동쪽에서 온다는 나의 운수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침판을 돌리고 있는가 갈 길을 잃고, 방향을 잃고 아득한 저 방파제 너머 그린 듯 앉아 있는 어부의 칼끝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는 흰 고래 한 마리, 울컥울컥 비린 부유물 쏟아내며 붉은 햇덩이 안고 돌아올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 안에..

한줄 詩 20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