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마루안 2022. 5. 2. 21:33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볼 때마다 주름이 더 패어 있는 시간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 봅니다

봄날의 주름은 청보리밭 이랑을 안고 산들바람에 일렁입니다

파란 허공의 주름은 응고되어서 안타까운 연애 같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주름은 살아서 숨을 쉽니다

 

가시가 뱉어 내는 붉은 줄장미의 화원을 거닐어 보셨습니까

평지의 중심에서 태어나 꼭대기로 가는 길을 내주었으나

흙 묻은 시간의 가시가 가슴을 깊숙이 찔러

신음을 삼키던 높이의 풍경은 어떻던가요

 

코끼리가 흰 다리로 지키는 따뜻한 사원을 지나가 보셨습니까

안온의 자궁에서 태어나 평온의 일상을 꿈꾸었지만

기다림의 과녁에 꽂혀

바닥의 웅장한 탯줄을 잘라 내던

딱딱한 충고의 혓바닥은 또 어떻던가요

 

슬픔을 삼키는 계단은 삼우제의 봉분처럼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며

높이를 버리는 계단은 그저

밀폐된 수도원의 밤처럼 통증의 음악도 무던히 견디는 것이겠지요

 

 

*시집/ 대서 즈음/ 천년의시작

 

 

 

 

 

 

휘어진 골목을 위한 안경 - 강시현

 

 

읽지 못하는 버려지는 책 속의 글자들이 졸음 속으로 무너졌다

무너지는 것들은 아름다웠다

골목을 내려다보던 별은 흉기처럼 뾰족하여

젖은 황토 같던 사람들 가슴에 자주 생채기를 냈다

이웃이 다니던 골목은 별빛에 긁혀 사그라졌다가는

악몽처럼 벌떡 일어나 갱도 같은 큰길로 바삐 걸어가곤 했다

겸손하고 말수가 적던 골목 모퉁이에도

가임기의 제비꽃 씨가 싹을 틔우고

가끔씩 두려운 풍문을 임신한 느린 그림자들이

배고픈 바람을 걸쳐 입고는

녹슨 대문 앞을 두리번거렸다

 

거절이 익히지 못한 이 골목에선

모난 바퀴들도 잘 굴러다녔고

망루 같은 전못대는 늘 둥근 것들의 게으름이 궁금했다

 

지금 이 순간에서 한 발짝도

도망치지 못하는 먼지 낀 유리창은

투명의 농도를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유형의 세월을 견뎠고

풍경이 지워지는 것을 보고도 묵음으로 처리되는 항변은

그것이 태생적이라 더 아팠다

 

한 사람이 무너질 때마다 마을의 지붕들은 푹푹 가라앉았고

골목은 오랜 그림자를 늘여

비단보다 매끄러운 찬바람의 이불을 덮어 보내 주었지만

빈소를 지키며 떠돌던 혼백은

장례식장 냉장실 저울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어야 했다

 

미련 없이 무너진 것들은 텅 비어서 한껏 아름다웠다

골목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선 햇살이 쏟아지고

흩어진 혼백의 분향 같은 담배 연기가 전깃줄에 걸려 어지러운데

귀향을 기다리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휘어진 골목을 편식하며 자주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