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우리는 환상적으로 헤어졌다 - 김태완

우리는 환상적으로 헤어졌다 - 김태완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는 이어진다 포옹을 하지 않아도 바짝 다가가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든 이어진다 너와 내가 한없이 달라도 생명이 없어도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는 이어지고 연결된다 마음이 닿으면 입구도 출구도 없는 빛 고운 방 안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나오지 않고 꿈틀대며 한자리를 지키는 고목으로 언제든지 그립고 향기로운 눈물이 될 수 있다 너와 나는 멀리 있어도 가깝고 가까이 있으면 꿈결 같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진 모든 것들이 작은 아픔에 마음이 닿은 줄 모르기도 하지만 외면하고 뿌리친 수많은 뒷걸음이야 온전했을까 한번 닿은 마음은 달빛 내린 방 안의 구석구석 별들이 가득했던 순간이 사라지는 이별을 만나더라도 네가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무..

한줄 詩 2022.05.17

미안하다 애인아 - 나호열

미안하다 애인아 - 나호열 세월은 거짓말도 용서한다 모질게 도망치듯 너를 보냈는데 때는 눈보라 치는 겨울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에서 내게 결별의 찬 손을 내민 것은 너였다고 말한다 다시 어디서든 너를 만날까 두려웠는데 내 눈 안에 너의 얼굴이 담겨 있어 눈물로 씻어내려 했다고 말한다 세월은 자꾸 흘러 거짓말은 거짓말의 진실이 되고 나는 견우 너는 직녀라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온몸을 웅크린 채 땅바닥에 내쳐진 돌멩이는 딱딱한 눈물이었다 세월은 주어를 이렇게 바꿔주는 것이다 *시집/ 안부/ 밥북 이름을 부르다 - 나호열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

한줄 詩 2022.05.17

사근진 - 심재휘

사근진 - 심재휘 오래전에 철거된 무허가 소주집은 경포 해변의 끝이었다 이름이 없고 사방이 유리창이어서 그냥 유리집이었다 한뼘 더 변두리인 사근진이 잘 보였다 경포에서 북쪽으로 지척인 사근진은 불 속에 침묵을 넣고 그릇을 만든다는 사기 장수의 나무 여름 해변의 가장자리에 놓여 경포도 아니고 그 너머도 아닌 가을의 변방 이를 테면, 추워져서 우리는 유리집에서 소주를 마셨던 것인데 할 말이 없어지면 겨울 사근진은 파도 소리를 데리고 유리집에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유리집이 사라져도 사근진은 남아 사근진이 없다면 말없이 조금 먼 곳을 바라볼 경포도 없을 것이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어떤 면접 - 심재휘 두명의 입학사정관 앞에 혼자 앉은 그는 문경에서 어제 저녁차로 올라왔다 한다 서..

한줄 詩 2022.05.15

봄밤의 일기 - 박위훈

봄밤의 일기 - 박위훈 세상의 귀란 귀는 다 닫아걸고 나를 들어줄 눈은 먼데다 두고 왔다 이를테면, 귀를 자른 어느 화가의 헐은 생애 같았지만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공중의 일 같은 거였다 보릿대 총총 푸른 불을 켜고 바람벽은 높고 높아 헛발질로도 닿을 수 없는 너와의 보이지 않는 불신의 간격처럼 거기, 다가설 수 없는 친연의 거리 갈대들이 서로 몸 비벼 겨울을 건너듯 뻐꾸기도 제 울음 한껏 불어재꼈던 그때 애끓는 탁란의 일기가 숲의 문장을 완성해 간다 구름의 등에 올라야 비의 내력을 알 수 있듯 바지게가 흘리는 달빛 몇 줌이 어둠을 품었던 것처럼 울음을 삼키며 천형의 날들을 견뎌야 했다 근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 누가 저 애면글면한 풍경에 혀를 차도 다만, 어미의 어미의 길을 좇을 뿐 떡국, 풀..

한줄 詩 2022.05.15

내 안의 원숭이를 보라 - 송경동

내 안의 원숭이를 보라 - 송경동 스물 초입 세상을 배울 때 꿈 하나는 나이 먹어서도 원숭이는 되지 말자였다 잠깐 민주주의자였다가 잠깐 정의의 편 참된 역사의 편이었다가 왕년의 시시껄렁한 무용담이나 늘어놓고 얕은 재주나 파는 이는 되지 말자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내 것인 양 사유화하고 헐값에 팔아넘기는 사람은 되지 말자였다 그러나 어느 틈에 내 안에도 들어와 사는 큰 원숭이 한마리를 본다 작은 재주에 으쓱하고 쉬지 않고 재롱을 부리며 광대처럼 무대에서 박수만 받고 싶어 하는 원숭이 사회를 검색하는 일보다 자신을 검색하는 일이 더 많고 숨겨진 진실을 캐는 일보다 눈곱만 한 자산을 계량하는 일이 더 많아진 원숭이 자신이 어떤 좁디좁은 철망 속에 다시 갇혔는지도 모른 채 몸집만 커다래진 *시집/ 꿈꾸..

한줄 詩 2022.05.13

내 무릎에 앉아 - 류흔

내 무릎에 앉아 - 류흔 내 무릎에 어머니가 앉아 토닥 토닥 등을 두드린다 하나의 종(種)으로써 관조할 거야 전반적으로 조용하던 밤이 부스럭댄다 죽지 말라고, 솔직히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밤을 눈물 쪽으로 옮긴다 새벽이 되어 흐르는 방울을 보라 너도밤나무처럼 다년생 슬픔들이 돋아있다 나도 그러하냐? 미량의 관능도 용서치 않을 거야 정직한 신음은 정상위에서 흘러나오지 나는 시험에 들었으므로 대학에 가서 미학을 배웠다 아름답고 다정한 원소(元素)를 골고루 나눠주었다 내 무릎에 애인들이 앉아서 셔츠 안으로 쓱 손가락을 넣어 젖꼭판을 슬 슬 문지를 때 나는 또 하나의 종을 염두에 두었다; 외부에서 내부로 탈출하는 우세한 감정의 무리들 저 온유한 쾌락을 무어라 명명하지? 시간은 콸콸 추억 깊은 계곡에서 흘..

한줄 詩 2022.05.12

거미집 - 한명희

거미집 - 한명희 첫째도 성실 둘째도 성실 셋째도 성실 수평으로 걸려 있는 사훈 아래 삐딱하게 서 있는 현황판과 부서진 의자가 거미집을 키우고 있는 가구 공장 사무실 지켜보다가 계속 외면하다가 맺힌 빗물이 저도 모르게 찔끔 떨어졌는지 공장을 덮고 있던 구름이 뜨는 해를 기다리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땀만 흘리다 사라졌는지 연극과 영화가 눈이 맞아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여덟이었다가 연기도 안 되고 얼굴도 안 돼서 몸이 되는 막노동으로 살다가 만난 여자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찾아온 거미집 -이름 모를 곤충들의 날개와 누군가의 목숨과도 같이 흔들리는 줄에 이슬방울만 방울방울 달고 있는 창가엔 먼지를 뒤집어쓴 탁자와 뚜껑 열린 주전자가 주둥이를 삐죽 내민 채 있고 막걸리 자국 선명한 컵들은 지붕조차 사라진..

한줄 詩 2022.05.12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병원 정문 앞 과일 노점상 붉은 사과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치욕의 공동체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늙음은 몸이 구부러지고 작아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병원은 절망의 늪이고 누군가에게는 갱생의 회랑이다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들어간 사람들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걸어나온다 언제부터 절망은 희망보다 더 깊고 짙어졌는가 불안과 원망은 왜 한통속인가 입안이 헐었다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뜨겁고 쓰렸던 것도 다 내 안이 헐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헐었다 구름이 따갑다 나보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노점상 앞 걸인은 여전히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햇살 한 줌이 고여 환하다 성자처럼 일어나 내 손을 움켜쥘까봐 저 한 줌의 구..

한줄 詩 2022.05.09

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돋보기의 시간 - 정덕재 온라인 서점에서 날아온 상자를 열기 전에 칼이나 가위를 찾아야 하고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목차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돋보기를 찾아야 한다 테레비를 보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 시간 자동차를 타려고 열쇠를 찾는 시간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찾는 시간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시간을 모아 놓고 습관과 게으름과 욕망 사이에서 잘못의 경중을 따지기 전에 목차를 읽는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오래전 살인사건의 혈흔을 찾던 돋보기는 낡아졌고 카펫 위 엉뚱한 머리카락을 찾다가 한가한 빛으로 들어온 오목렌즈 놀이로 태워 버린다 보청기는 없더라도 상자 밖으로 새어 나오는 파열음을 추적하기 위해 돋보기는 찾아야 한다 거기에 살해당한 문자들이 묻어 있을 것이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5..

한줄 詩 2022.05.08

무렵 - 김화연

무렵 - 김화연 무렵이란 말 좋지 마지못해 기울어진 즈음,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거나 빨려 들어가기 쉽지 모든 것을 두고 온 곳이거나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곳 시소처럼 무거운 것은 뜨고 가벼운 것은 내려앉는 그런 무렵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도 좋고 붉게 하교하던 노을이나 제철 꽃들의 기억을 모두가 나누어 갖고 있는 그 무렵들 하루에도 몇 번 있고 한 달에도, 몇십 번 있는 움직이는 무렵 아득한 핑계들을 모아도 좋은 그립다고 말해도 좋고 지긋지긋하다고 진저리를 치기도 좋은 해 질 녘 만나면 추적추적 내리는 홑겹의 비를 덮고 낮잠을 자도 좋은 그런 저런 무렵들 어디까지 가는 스산함일까 가을 들녘을 아지랑이처럼 걸어와 흰 머리카락을 벗기다 갈 이런저런 소문으로 마무리되는 무렵들 비스듬한 날씨나 특별한..

한줄 詩 2022.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