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 송병호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제자리인 그 골목엔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목길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 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장래선은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너머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상학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

한줄 詩 2022.04.17

마음이 콩 같아서 - 박수서

마음이 콩 같아서 - 박수서 그런 거 있잖아 책상 위에 놓여있던 화분이 말라 죽어 치워버리면 유독 그 빈자리가 신경 쓰여 무엇이라도 채워 놓고 싶은 마음 어느 날은 외려 비우려 애써도 책상 유리에 붙인 오래된 중국집 광고 라벨처럼 긁어내려 아무리 밀어도 말끔하게 비울 수 없는 젖은 눈곱처럼 끈적해진 마음 그런 마음, 밤새 알을 낳는 흰 눈에게 들킬까 봐 자다 깨다 괜한 알전구만 켰다 껐다, 전선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심장 쪽 전류 를 꽁꽁 얼려 망가트리려 냉골을 찾아 웅크리고 울어도 콩콩 뛰는 마음 마음이 마음의 어깨를 툭 치고, 마음이 마음의 마음을 금가게 하고 마음이 마음에게 미안해하고, 마음이 마음을 마음 아프게 하고 그런 마음, 방갈로 짓고 식어버린 도시락이라도 까먹고 싶은 날 멀리 떠나 당도하지 ..

한줄 詩 2022.04.16

지구 6번째 신 대멸종 - 최백규

지구 6번째 신 대멸종 - 최백규 봄이 와도 죽음은 유행이었다 꽃이 추락하는 날마다 새들은 치솟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날렸다 네평 남짓한 공간은 개의 시차를 앓고 핏줄도 쓰다듬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 손목은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불타는 별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흙에서 비가 차오르면 일초마다 꽃이 지는 순간 육십초는 다음 해 꽃나무 퍼지는 담배 향을 골목에 앉아 있는 무거운 돌이라 생각해보자 얼어붙은 명왕성을 암흑에 번지는 먼 블랙홀이라 해보자 천국은 두번 다시 공전하지 못할 숨이라 하자 이것을 혁명이자 당신들의 멸망이라 적어놓겠다..

한줄 詩 2022.04.16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꼬박 오십팔 년하고 삼 개월 그래왔듯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슬픔이나 나의 면모가 상세히 기록된 플라스틱 칩 따위 와작 와작 씹어 삼키며 현장에 가야 한다. 그간의 나는 끈질긴 나의 용의자, 누군가에게 추적을 당했다면 범인은 나 자신이다. 고통 없이 잘 찔리기 위해 날을 벼려왔다. 원하는 국면이 찾아오기를 소원하며 살아왔으니 나의 천적이 나일밖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구나 익지 않은 술을 은밀한 어디에 묻어두었는지 친구에게 가리켜주지 않은 채 나는 죽었다, 어제 밤 야하고 아리따운 꿈속에서. 깜짝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척 내지 않으려고 아주 멀리 있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어머니와 다른 방에 잠든 가족을 위해 죽음보다 ..

한줄 詩 2022.04.14

들판의 권력 - 이우근

들판의 권력 - 이우근 꽃은, 자기 자리가 좋으면 얼른 씨를 뿌려 그 자리를 내어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계절을 넘어 더 좋은 꽃으로 피고 들판은 무상으로 임대를 내어주고 그 대부분의 배경과 풍경인 잡풀들은 더욱 생식력이 좋아 더불어 번성하면서 혼자인 듯, 모두 다인 듯 어깨동무할 이유가 없지 않아서 그 아래의 자잘한 것까지 거듭 거두어가며 지평을 넓힌다 창백하나 검소한 겨울이 가면 본능적으로 포실한 봄이 오는 없어도 많은, 넘치는 공간 순환이 순한 곳 그것이 들판의 권력 널브러져 있는 사소한 것들 미세하게 산소를 공급하는 존재들 잊혀진 것들 그러나 아무도 평등이나 계급을 요구하지 않으니, 그 충만한 무욕(無欲), 구름의 미끄럼틀이라 낄낄거리고 바람의 정거장이기도 해서, 그냥 오줌 막 누고 싶은 들판 그렇게..

한줄 詩 2022.04.14

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햇살이 뽀얗게 불어터진 젖 물리면 내가 좋아하는 숙자와 이사 가고 싶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동네 작은 방 얻어 들어가고 싶다 떠돌이 악사와 그 애인이 밤새 다투는 소리 샤워하는 소리 키들거리는 소리 서울행 열차가 우르르 지나가는 기찻길 옆 퉁퉁 분 오줌보 비우려 밖으로 나서면 반짝이는 잔별들 한 시절 곱게 늙어가는 약국 고소한 냄새 풍기는 빵집이 있는 네거리 하루하루 쫓기는 탈주범처럼 중고 제품 판매 구인 구직 급전 대출 아르바이트 모집 생활 광고지 죄다 뒤져 살림 차리고 싶다 눈도 코도 오목조목한 숙자와 함께 알록달록 고운 그릇들 장난감 같은 가재도구들 "아이 예뻐!" 호들갑에 맞춰 근사한 미소 흘리며 까짓것 한 번 사는 인생, 큰소리치면서 이불장 빨래걸이 앉은뱅이상 창..

한줄 詩 2022.04.13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 김명기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 김명기 강아지 다섯 마리와 다리 부러진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다 놓으니 날이 저문다 이 좋은 가을날에도 태어나 버려지는 것들이 있어 저마다 살겠다고 어둡고 습한 곳으로 숨어든다 잊지 못한 자궁의 기억 때문일까 엉덩이를 돌린 채 고개를 파묻고 몸을 떤다 작은 몸에 손을 대면 고스란히 손끝에 전해지는 두려움 지붕을 맞댄 낡은 집들이 세상의 처음이자 전부인 곳에서 아무리 달래 보아도 눈빛은 돌아설 줄 모르고 털뭉치 같은 몸을 더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희미한 신음이 너무나 살고 싶다는 말 같아 나도 신음처럼 그래그래 입내 소리를 어둠 속으로 흘려보내며 무릎 꿇고 팔을 뻗는다 겨우 한자리에 모아 놓은 출처 알 수 없는 생들 어느 집 갈라진 아궁이 속 어둠이 그대로 남은 새까만 눈..

한줄 詩 2022.04.13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 박위훈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 박위훈 발라진 울음이 낮다 한 부음이 자정의 담장을 넘는다 귀를 버린 내게 들리는 핏빛 이명 닳아 쉬어 터진 음정을 재생하는 엘피판처럼 어둠은 등을 맞댈수록 무딘 가시를 곧추세웠다 어떤 관절은 새소리를 달여 무릎이 서고 새벽은 음식물 봉투 속 불은 라면 면발을 딛고 온다 이슬의 찬 독배를 마신 돌배나무가 밤의 태엽을 나이테에 감으며 알려주던 당신의 적소(適所)에서부터 어둠이 시작됐다는 말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는 허기이거나 어떤 소외 식어 화석이 된 심장에 온기가 돋듯 활처럼 휜 허기가 어둠의 거푸집을 할퀼 때 달무리를 감싼 주검의 문양을 보았다 부패된 귀로는 새를 부를 수 없어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너를 듣는 밤 나이테에 감기는 비명을 사뿐, 물고 가파른 ..

한줄 詩 2022.04.12

천국의 날씨 - 윤의섭

천국의 날씨 - 윤의섭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꿈의 잔영은 언덕 너머로 이어진 길이다 나는 미아였다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갔으나 살던 집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나는 미아의 미아다 어딘가라는 곳에 도착 중일 뿐이라는 해몽은 틀리지 않다 꽃이 피면서 동시에 지고 있는 벚꽃처럼 마지막으로 피어난 꽃도 모르고 가장 오래 살다 죽은 꽃도 알 수 없는 벚꽃의 연대기처럼 뒤엉킨 오후 나는 벚꽃을 분다 숨이 다 새어나가도록 끝은 다가오는 게 아니라 다가서서 만나는 것 일어설 이유가 없을 때까지 기진해 왔고 지친 사람들은 서로 곁에 오래 머문다는 것을 안다 그때 가장 적당한 온기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루프 - 윤의섭 쪽창으로 하늘을 올려보는 아이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순식간에 늙었다 돌아..

한줄 詩 2022.04.12

속절없이 출렁이며 - 강시현

속절없이 출렁이며 - 강시현 당신은 죽어 별이 되리라는 뭉클한 말 때문에 가랑이를 벌리고 고통을 찢으며 나를 낳았지 안날 일기예보에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많이 쏟아지니 지붕에 난 창문을 잘 닦아 놓으라 했어 별들의 유혹이 닥쳐오리니 짓물러진 마음을 잘 묶어 두라 했어 올해는 별 농사가 잘됐어 풍년이야 산마루 가까이 지은 집은 하늘과 가까워 별숲이 더 반짝거려, 별들이 폭설로 쏟아져 별을 녹여 얼굴을 씻고 밥을 지어 먹지 어떤 날은 늙은 별들이 푹푹 쌓여 길을 지워 귀갓길을 잃기도 하지 아랫마을 노파는 보란 듯이 별의 숲에 묻혔지 여기엔 금고도 없고 도둑도 없지 별은 향기로운 스무살 가슴처럼 몰랑몰랑하지 아픔도 상처도 머물지 못하는 별의 무리 속으로 가뭇없이 지워져도 아무도 슬프지 못하지 나를 낳은 여자의 ..

한줄 詩 202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