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마루안 2022. 5. 7. 21:27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밀물이 안 올까 봐 썰물이 소리 내어 우는 건 아니다

해 질 녘 동해 바다는 모래톱까지 달려와서 운다

바다는 지구의 끝인가 시작인가, 물으며

내 안에 와서 금을 긋던 사람들

흉금 안쪽에 파란 색칠을 하던 사람들도

묻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추억이라 부르지만 나는 속도라 부른다

추억의 몽리구역까지 갔다 오는 데는

실로 한생이 걸린다

나는 인간의 시간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나는 농막에도 앉고 테트라포드에도 앉아 별점 치다

한 세기를 놓쳐 버렸다 놓친 세기는 역사박물관으로 간다

오늘은 모래의 밥을 먹으며 타고 남은 속마음을 바느질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오늘의 슬픔을 어디다 잠가 두면 새어 나가지 않을까 생각다가

갓 핀 잠자리난초를 밟는다 해도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가을의 규칙 - 이기철

 

 

나의 하루는 언제나 저녁이 오는 방향으로 걸었다

나와 눈 닿았던 사람들이 앉았던 벤치에 차츰 온기가 사라지고

붉게 핀 칸나를 자르는 가위에 흰 피가 묻는다

나는 벳사이다가 지구의 어느 땅에 있는가를 물을 때마다

어김없이 오는 가을의 규칙을 생각했다

음악은 늘 고요를 딛고 와 내 귀에 소왕국을 세운다

그 나라는 휴식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는 소리의 제국이다

햇빛의 비수에도 나무는 살을 베이지 않고

어떤 침엽수도 제 바늘로 빗방울을 찌르진 않는다

숲으로 가는 사람의 어깨에 나뭇잎을 내려보내며

가을은 땅 위에 재어지지 않는 큰 발자국을 남긴다

못 부른 이름들이 부른 이름보다 더 많은

이 가을을 무슨 가슴으로 다 껴안을 것인가

아침이 푸성귀의 입으로 말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비로소 잠의 낭하를 걸어가는

맨드라미도 눈 감는 늦은 가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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