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젊어서 못 견딜 고통은 없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의식을 잃거나 죽고 마니까 살아있다면 견디는 거지 고통에도 습관의 수준이 있어 그러니까,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 한계선을 높여 놓아야 해 평탄한 길만 걷는 자들은 고원 길이 힘들다 하겠지 젊은 날엔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봐야 해 더 높은 길을 탐험해 본 자에게 고원쯤은 산책 길일 테니까 자신의 두 발로 생존 배낭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묵직이 올라서던 심장이 터질 듯한 그 벅찬 길이 자긍심이 되고 그리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시대가 얼마나 좋은 시대인지를 모르지 나만 고통스럽고 나만 불행하고 나만 억울하다고 체념하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물리적 몰락이나 통증이 아냐 심리적 몰락이고 ..

한줄 詩 2022.06.02

그림자의 변명 - 우혁

그림자의 변명 - 우혁 조금 덥다 싶은 날이면 허투루 흩어놓은 듯한 철자들을 찾아보아요 성급할 것도 없는 오후, 오전부터 쌓인 별은 자신의 퇴적층에서 당신의 눈을 화석처럼 발견하곤 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라던 닦으라고 애원하던 오래된 노랫말은 '무엇인가 꽉 찬' 지면 위에 라벨처럼 붙어 있어요 그러다 당신은 무심결에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몸 바뀐 그림자 난 사랑을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 없음에 대한 기록들 있어 본 적이 없는 운명들을 종종 잘못된 발음으로 발화해요 괜찮아요 오자를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있어달라는 애원이었죠 이럴 때 흘리는 눈물은 제법 알 굵은 호박색이랍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바람 - 우혁 -몸 밖의 모든 것은 푸르다 돌아올 때는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네 눈..

한줄 詩 2022.06.01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깎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겨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시집/ 설명..

한줄 詩 2022.06.01

일인칭 극장 - 이현승

일인칭 극장 - 이현승 마음이 하는 짓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였지만 또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였으므로 어쩐지 위대함으로 압도하는 당신 앞에서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될까. 마음은, 왜 그러는가 꼭대기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응시하면서 그런다고 더 빨리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더 힘껏 더 자주 호출 버튼을 누르고 멀리 보면 모두들 제각기 갈 길을 갈 뿐인데 누군가가 자꾸 내 인생으로 끼어든다고 생각하며 어쩌다 내가 가서 한잔하면 그 술집에 손님이 붐빈다거나 심지어는 내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는 내가 안 봐야 이긴다거나 변덕이죽 끓듯 한 이 마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없는가. 마음은 유령거미처럼 종종 여기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가 없..

한줄 詩 2022.05.31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계산이 묻어 나온다 반갑기보다 저의가 묻어 나온다 내심 잘도 잊지 않았구나 싶은데 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 때론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더구나 네가 아직 죽지도 않았더구나 궁금하기도 해서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 넌 먼 강산과 오늘 날씨를 말하더구나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을 끌어들이더구나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더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 쓸개 빠진 덕담과 공허한 잡담 부탁 아니면 둘도 없는 네 외로움 전화를 기다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더구나 네가 아직도 글을 쓰더구나 나는 내가 쓴 글에 관심 없는데 넌 먼 평판과 오늘 인심을 말하더구나 나의 벌거숭이 문장을 말하..

한줄 詩 2022.05.29

조난신호 - 전대호

조난신호 - 전대호 말 없는 바닥아, 목숨 붙은 이래 줄곧 허공에 매달려 있었기에 우리 서로 닿은 적 없구나. 필시 귀도 없을 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구나. 암벽에 달라붙은 그가 문득 이동을 멈추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시작했을 때, 홀드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쥐며 자유로운 팔로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무릇 목숨 붙은 놈이 보내는 신호는 다 조난신호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곧 간다고, 철퍼덕 들이닥쳐 속을 다 쏟아놓겠다고, 바닥에게 기별하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뭐 대수로울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말 없는 바닥을 향한 조난신호였으므로.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닻과 연 - 전대호 내가 내린 닻 바닥에 닿지 않았지. 애당초 기대하지 않..

한줄 詩 2022.05.29

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 박봉준

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 박봉준 뻐꾸기 새끼에게 쉼 없이 먹이를 잡아다 먹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뱁새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뱁새 새끼를 모두 밀어내 죽이고 염치없이 입을 벌리는 덩치 큰 뻐꾸기 새끼 뱁새는 탄생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모순을 사람들은 섭리라고 하겠지 어쩌다 제 손으로 혈육을 키우지 못하고 심청이 아비 젖동냥하듯이 이곳저곳 탁란하여 눈도 채 뜨지 못한 어린 새끼 손에 악의 피를 묻히는 뻐꾸기의 생도 참 기구하다 싶어 그 소리 다시 들어보니 녹음 짙어가는 들녘이 다 평화로운 것만이 아니다 천치 같은 뱁새도 피를 묻힌 뻐꾸기도 함께 살아야 하는 푸른 오월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그까짓 거, 참 - 박봉준 한날한시에 죽지 못한다면 남은 사람들을 ..

한줄 詩 2022.05.28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찰칵, 한순간이다, 한 번 갇히면 도망갈 수 없다.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도 아이처럼 해맑아서 무덤 속으로도 발을 내릴 수 없다 도라지꽃밭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밤을 당신의 발처럼 만질 수 있는 곳. 모든 세상이 거짓말 같아서, 도라지꽃이 필 때도 도라지꽃이 질 때도 사람은 사람을 끝내 고쳐 쓸 수 없어서 사진 속에서 희멀겋게 웃고 있는 당신을 꺼내 발톱을 깎아 준다. 오늘은 내가 좀 착해진 것 같다. 느닷없이 이 형용사는 살 같다. 그래서 당신은 웃고 나는 울고 기억이란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의 뼈, 그러니까 촉망받는 주검들의 이야기. 당신 덕분이라고 쓸 수 있다. 언제부터 내 사랑은 골동품 상점의 고문서가 되어 버렸을까. 아버지,..

한줄 詩 2022.05.28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부드럽게 하고, 틈새로 내밀고, 물방울 모으고 서리 묻은 이마 녹이고 움츠렸던 근육 멀리까지 뻗고 단단한 껍질 부수고 아직은 약한 햇빛 뼛속으로 끌어들이고 늦눈 대비해 촉의 대담함 자제시키고 어린 꽃마다 술 달린 가리개 걸어 주고 북두칠성의 국자 기울여 비를 내리고 울대 약한 새들 노래 연습시키고 발목 겹질린 철새 엉덩이 때려 떠나게 하고 소리 없이 내린 눈 물소리로 흐르게 하고 낮의 길이 최대한 늘리고 속수무책으로 올라오는 꽃대 길이 계산하고 숨겨 둔 물감 전부 꺼내 오고 자신 없어 하는 봉오리들 전부 얼굴 쳐들게 하고 곤충의 겹눈에서 비늘 벗기고 꽃잠 깨워 온몸으로 춤출 준비하고 존재할 충분한 이유 찾아내고 가진 것 남김없이 사용하고 작년과 다른 방향으로 촉수 나아가게 하고 ..

한줄 詩 2022.05.27

검은 악보 - 신철규

검은 악보 - 신철규 중부고속도로에서 형체가 너무 뚜렷한 사체를 보았다 고양이인지 개인지 확인할 시간도 없이 지나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낭만적이거나 과격한 노래를 틀어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경악 가두지 못한 눈물이 쏟아지고 거두지 못한 부은 발은 내 뒤에 남아 있다 구겨진 심장이 펴지지 않는다 상하행선을 가르는 시멘트 분리대 근처에서 넘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던 그것은 한참을 망설이다 머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번개처럼 지나간 둔기에 튕겨져 분리대에 다시 몸을 부딪치고 쓰러졌을 것이다 생생한 죽음은 싱싱한 주검이 되어갈 것이다 핏물이 번지고 흐르다가 말라붙을 것이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분리대에 막혀 보이지도 않을 것이..

한줄 詩 2022.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