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 무늬 - 이도훈 오르막 무늬 - 이도훈 사람에게 힘든 길이어서 사람밖에 다닐 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동안 나는 오르막 나이만 먹었다고 여겼다. 가파른 나이였다. 불빛들은 어떻게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까 헉헉거리는 경사로를 끌고 다녔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하고 싶었다. 고지대로 올라갈수.. 한줄 詩 2020.04.07
바람 불어 너도나도 바람꽃 - 이원규 바람 불어 너도나도 바람꽃 - 이원규 밤의 휘파람을 부니 밤바람이 분다 간절히 바라노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파풍(破風)의 대숲 성난 깃털을 쓰다듬으며 수다쟁이 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래 잊었던 눈짓 손짓의 살가운 부채질 그날 밤 살구나무 아래 꼴깍 침 넘어가던 소리 하릴없.. 한줄 詩 2020.04.06
나에게 이르는 길 - 백무산 나에게 이르는 길 - 백무산 몇해 전 살구나무 한그루 심어놓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주위에 살구나무가 한그루도 없어서인데 다음 해에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또 믿기지 않았다 자기수분을 할 거면 열매로 시작하지 꽃은 왜 힘들여 피우나 속살 벌겋게 드러내고 천지사방 분을 날리고 향.. 한줄 詩 2020.04.05
옥수동 - 박은영 옥수동 - 박은영 키가 한 뼘씩 웃자랐다 구름 밑의 옥수수처럼 껍질을 벗고 죽은 살을 뜯어먹으면 말을 더듬는 혀끝에 단맛이 돌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알알이 많은 내가 어제도, 이번 정거장에도 유통기한이 넘은 깡통 속에도 있었다 때론 조조할인 영화를 본 날은 이유 없이 나를 부풀리.. 한줄 詩 2020.04.05
벚나무 집 마당 - 정병근 벚나무 집 마당 - 정병근 바람이 집을 비운 사이, 꽃은 방문을 열어 서둘러 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비 끝에 돌아온 바람이 꽃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댄다 꽃의 소문이 마당에 나동그라진다 등을 말아 추궁을 견디는 꽃 외면하며 헛구역질하는 꽃 꽃이 뭘 했는지 모르겠는 바람은 그게 분.. 한줄 詩 2020.04.05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 김시종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 김시종 무언가 끝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나이 때문은 아니다. 아니 나이가 들었기에 느끼는 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깎고 또 깎은 염가로 마구 다투고 있는 물건. 물건. 물건. 물건에 들러붙은 가난이 풍족함에 둘러싸여 북적대로 있다. 메말라가는 지구.. 한줄 詩 2020.04.03
있는 그대로,라는 말 - 손택수 있는 그대로,라는 말 - 손택수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 한줄 詩 2020.04.03
노동의 끝 - 이철산 노동의 끝 - 이철산 이 순간이 끝나기를 애태워 기다린 때 있었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보란 듯 떠나고 싶었다 환갑이 다 되도록 허드렛일에 세월 버렸던 그 사내가 공장일 낱낱이 모르는 것 없다는 그 사내가 홀로 삼십 년을 묵묵히 공장을 지켰던 그 사내가 고작 수위실 따위에서 노동.. 한줄 詩 2020.04.02
보라는 아프다 - 정선 보라는 아프다 - 정선 햇빛이 하루 소임을 다할 때 숨죽인 짐승처럼 보라는 서녘 하늘에 제 거친 숨을 토해 낸다 한 호흡에는 열정을 한 호흡에는 절망을 그 많은 호흡들이 갈 곳을 몰라 때로는 먹구름으로 헤매고 때로는 뜨거움을 바다에 쏟으며 통곡하는 것을 바람은 뜬눈으로 기록한다.. 한줄 詩 2020.04.02
만우절 - 성동혁 만우절 - 성동혁 궁금한 것은 죄구나 전도사는 나를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 안달인가 보다 격양하는 인간이여 양들의 머리통을 자른다고 어찌 죄 사라지는가 휘장 밖에서 기다리는 이여 불길한 꿈을 납득하고야 마는 인간이여 우린 영원히 갇혀 있구나 학설에 의해 스스로 정하지 않은 부모에 의해 예배당 순결하게 모여 죄인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몰아치는 거짓말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은 인간이여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사랑도 두려움으로 하는 인간이여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책 더미 - 성동혁 백미러엔 종종 당신 얼굴 비친다 더 비참할 게 남은 사람처럼 아무리 운다고 하여도 아무리 주저앉는다 해도 땅과 하늘을 다시 꿰맬 순 없다 그건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새벽의 빈 횡단보도를 지날 땐 신호 대신 더 많은 것들이 .. 한줄 詩 202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