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위 흰 눈 - 김창균 목련 위 흰 눈 - 김창균 작심한 듯 주먹을 움켜쥔 아이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을 건네는 설렘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시비를 거는 건달처럼 그렇게 그렇게 백내장 수술을 한 외할머니가 두툼한 안대를 하고 빼꼼이 삼월 목련을 보는데 그 애미보다 일찍 세상 같은 건 버린 내 엄마는 탱.. 한줄 詩 2020.03.27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 - 황규관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 - 황규관 전기도 기계도 부족한 때가 있었다 그 대신 불거져나온 힘줄과 헐렁한 눈빛과 단출한 생활이 있을 때였다 멀리 있는 사람들 향한 그리움이 무성한 때가 있었다 돈도 일할 사람도 모자라 혼자 공장 문을 열고 쇠를 자르고, 붙이고, 깎고, 조인 다음 온 근육.. 한줄 詩 2020.03.27
날개 없는 새 - 윤병무 날개 없는 새 - 윤병무 일이거나 술이었던 시절이었다 혼자 야근하는 마술사를 엿보았다 마술사는 비둘기 날개를 이발했다 멀리 날 수 없는 흰 새들 회전목마처럼 마술사를 맴돌았다 폼 나게 차안을 뜰 수 있는 묘수였다 겨울에 우는 비닐봉지 같은 날이면 새 없이도 생각했다 가위 같은 .. 한줄 詩 2020.03.27
적막 - 고영민 적막 - 고영민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 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 한줄 詩 2020.03.23
나는 너의 상주가 되어 - 문동만 나는 너의 상주가 되어 - 문동만 어떤 자세로 죽을 것인가 고심한 사람 같았다 부목도 없이 절뚝이며 진눈깨비 속을 걷던 너는 새순 같던 혀를 말아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누구도 쓰러진 너를 진맥하거나 푸르뎅뎅한 눈꺼풀을 열어보지 않았다 각각의 깊은 호리병 속으로 부리를 들이대.. 한줄 詩 2020.03.23
하루만 더 살고 - 한관식 하루만 더 살고 - 한관식 당신보다 하루만 더 살고 뒤따르리다 이승의 인연 모나지 않게 정리하고 당신 곁에 묻어 달라 유언하며 사랑한다는 그 말, 숨결 여린 당신 무덤 발로 다지며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그 말 함께 보낸 세월 속에 들려주리다 땅거미 지면 나 또한 준비하고 그랬던가.. 한줄 詩 2020.03.22
행성의 새벽 - 윤의섭 행성의 새벽 - 윤의섭 잠이 들고 다시 이 마을이다 이정표는 올 때마다 바뀌었지만 늘 같은 길이다 지형이 낯설지 않으니 죽어 나간 자들이 머무는 곳이거나 한 번쯤 거쳐 온 여로였거나 생시에서는 미아의 마을이라 이름 지었다 태양 같은 별 주위를 맴도는 천체가 행성이다 벗어나지 못.. 한줄 詩 2020.03.22
내 마음 기우는 곳 - 박경희 내 마음 기우는 곳 - 박경희 안녕리에 가보면 맥없이 솟아 있는 기둥이 여러개 모두 이별한 것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안녕리에서는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이다 무거운 발걸음 속 달라붙는 그림자 깨진 기왓장이 끌어안고 있는 빛 잃은 알전구와 덩그러니 빈집 마당을 지키는 구멍 환한 항아리 버석거리는 나무 기둥이 나이테를 놓은 곳이다 때론, 사선으로 잘려나간 대나무 끝에 가슴을 다치기도 한다 내 마음 한 자리 빗금으로 내려앉아 우는 사내 대숲이 일렁이는 곳에서 바람 부는 쪽으로 내 마음 기우는 것도 짧은 대나무 마디로 살다 간 사내의 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리에 가보면 처마 끝 밑구멍 환한 목어가 바람가는 곳으로 몸통을 두드리고 있다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 한줄 詩 2020.03.21
투명 - 하린 투명 - 하린 인공 눈물을 화분 속에 떨어뜨리고 싹트길 기다려 볼까요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사랑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서쪽 하늘이 무표정을 버릴 때까지 우는 시늉을 해 볼까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해지는 허무를 위해 D-day를 표시하며 하루에 세 번 웃어 볼까요 바짝 마른 그리움.. 한줄 詩 2020.03.20
너에게로 가다 - 김사이 너에게로 가다 - 김사이 이른 봄날 어미의 팔짱 꼭 끼고 나들이 간다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미황사에 간다 법당에 들어선 어미의 두 손이 하늘을 받들어 늙은 소처럼 살아온 시간이 지긋지긋해 도망갈 수도 있었으련만 등을 타고 엉덩이로 흘러가는 골 깊은 길 사랑이 탱탱하게 둥글 때가.. 한줄 詩 2020.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