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에게 이르는 길 - 백무산

마루안 2020. 4. 5. 19:35



나에게 이르는 길 - 백무산



몇해 전 살구나무 한그루 심어놓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주위에 살구나무가 한그루도 없어서인데

다음 해에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또 믿기지 않았다

자기수분을 할 거면 열매로 시작하지 꽃은 왜


힘들여 피우나 속살 벌겋게 드러내고

천지사방 분을 날리고 향기로 어지럽히고

소음에 귀를 열고 온갖 것 불러 모으고

머리를 헤치고 밤바람에 싸돌아다니고

열린 몸은 거친 부리에 노출되면서


꽃에서 시작해서 꽃으로 돌아올 일을

왜 저리 요란을 떠나

나에게 건너가는 길이 내 안에는 없다는 건가

저 바람 속에 햇살 속에 거친 눈보라 속에

저 인간들의 아비규환 속에 저 고단한 길 위에나 있어


바람이 나보다 한걸음 앞에 있어서

길이 언제나 나보다 한발 먼저 있어서

말이 언제나 나보다 반걸음 앞에 있어서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봄날에 꽃을 들고 - 백무산



봄을 기다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겨울을 좀더 붙들어두고 싶어

안달을 해온 때가 또 언제부터였나


어릴 적엔 깊고 으스스한 겨울밤이 좋아

아득히 꾸던 꿈들이 흩어질까봐

그 멀고 먼 나라로 데려가던

눈부신 설원이 사라질까봐

그러나 날이 풀리면

정든 이들 살길 찾아 뿔뿔이 떠났기에

땅이 풀리면 고된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펼쳐지는 것은 화원 아니라 화흔이었기에

풀려나온 것은 심장을 찢는 비명이었기에

흩날리는 것은 꽃향기 아니라 피비린내였기에

애도의 회한들은 얼음 풀리듯 터져나오고

아픈 기억이 짓뭉개진 손톱에 핏물 적시기에

겨울을 오래 붙들어두고 싶었네

꿈은 더 깊어졌으면 했었네


하지만 가버렸네 다 가버렸네

꽃잎 여는 소리를 듣던 두 귀도

잎새 흔들던 바람에도 나비처럼 타오르던 심장도

이제 영영 내 것이 아니네


꽃들 난분분한 이 봄날에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쫓기는 짐승 같은 내 심장을 만져보네

불에 거멓게 덴 심장을






#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84년 민중시 1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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