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우절 - 성동혁

마루안 2020. 4. 1. 22:13

 

 

만우절 - 성동혁


궁금한 것은 죄구나
전도사는 나를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 안달인가 보다

격양하는 인간이여
양들의 머리통을 자른다고 어찌 죄 사라지는가
휘장 밖에서 기다리는 이여

불길한 꿈을 납득하고야 마는 인간이여
우린 영원히 갇혀 있구나
학설에 의해
스스로 정하지 않은 부모에 의해

예배당 
순결하게 모여
죄인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몰아치는 거짓말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은 인간이여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사랑도 두려움으로 하는 인간이여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책

 

 

 

 

 

더미 - 성동혁


백미러엔 종종 당신 얼굴 비친다
더 비참할 게 남은 사람처럼
아무리 운다고 하여도 아무리 주저앉는다 해도
땅과 하늘을 다시 꿰맬 순 없다
그건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새벽의 빈 횡단보도를 지날 땐
신호 대신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농원을 지나가는 전신주
나는 그 정도로 가고 있다
우연을 믿는 사람 옆엔
우연을 오래 만든 사람이 있다
우린 꼭 부딪히기 위해 길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느닷없이 부딪치다 느닷없이 사라지기 위해
동선이 겹치는 것들은 어딘가에서 한번 솟구친다
뿔처럼 솟아나 있는 겨울나무와
불편한 응접실의 두 무릎
그런 볼품없는 슬픔엔 휩싸이지 마요



 

# 성동혁 시인은 1985년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6>, <아네모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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