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옥수동 - 박은영

마루안 2020. 4. 5. 19:21



옥수동 - 박은영



키가 한 뼘씩 웃자랐다


구름 밑의 옥수수처럼 껍질을 벗고 죽은 살을 뜯어먹으면

말을 더듬는 혀끝에 단맛이 돌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알알이 많은 내가 어제도, 이번 정거장에도

유통기한이 넘은 깡통 속에도 있었다

때론 조조할인 영화를 본 날은

이유 없이 나를 부풀리기도 했다

겨드랑이와 가랑이 사이가 간지러워 실실 웃다가도

틀니를 낀 노인이 지나가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누구의 잇몸에서 빠져나왔을까

가끔 유치한 상상을 했다

영구치도 영원하지 않고

바람이 검은 안경을 쓰고 하모니카를 부는 동네

어금니가 닳도록 치열하게 살아도

붓고 시리고 흔들리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꾸 뭔가가 끼었고

속살을 깨무는 버릇이 생겼다

구름을 덮으면

죽은 동생이 이갈이를 하며 사카린을 뿌렸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었다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사








저녁 없는 삶 - 박은영



작업은 끝이 없었다 기계처럼 움직여 잔업을 마치면 야근이 기다리고 회식이 잡혔다 공휴일은 등산복을 입고 출근하거나 체육복을 입고 퇴근했다


설명서가 없는 삶이었다


주름보다 먼저 두통이 왔고 구두 굽보다 먼저 발꿈치가 닳았으며 나보다 먼저 입사 동기가 승진을 했다 지하철에 빈자리가 생기면 보상을 받는 듯도 했다 그 작은 의미를 던져주며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은 짧고 낮은 길다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품 하나가 없어도 움직이는 기계처럼,


세상은 돌아갔다


저녁 없이도 돌아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 해마다 년초가 되면 신춘문예 당선작을 유심히 찾아보던 습관이 있었다. 요즘은 그것이 시간 낭비 같아서 많이 시들해졌다. 세 해 전쯤인가. 몇 편의 당선작을 훑어보다 막막함 끝에 이 시인을 발견했다.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좋은 시인이 탄생했다고 믿었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이렇게 빨리 첫 시집이 나올 줄 몰랐는데 그만큼 시인은 오랜 기간 시적 내공과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낭중지추의 전형이다. 좋은 시를 발견하면 심사평과 소감을 꼼꼼하게 읽는다. 1977년생 시인은 비교적 늦은 나이의 당선이었다. 그녀는 2018년 문화일보 당선 소감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나의 아들아! 창문 없는 고시원을 거쳐 이민 가방을 끌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막막했니. 비록 웅크리고 꿈을 꾸지만 볕 들 날이 너에게 오리라 믿는다. 너와 나는 약하지만 언제나 강했다>.


당선 소감이 이렇게 애틋하면서 詩적이라니,, 그리고 최종심을 맡아 이 시인에게 문을 열어준 정호승, 황동규 선생의 심사평은 이렇다.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맞다. 요즘의 시판에서 시 쓰는 기술은 좋으나 뜬구름 잡는 공허한 시를 읽을 때면 막막함이 밀려 온다. 때론 내 무식함을 탄식하기도 한다. 그 막막함 끝에 이렇게 좋은 시를 발견한 기쁨이라니,, 이런 시인이 있어 내가 시읽기를 끊지 못한다. 이런 시로 위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