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보라는 아프다 - 정선

마루안 2020. 4. 2. 21:30



보라는 아프다 - 정선



햇빛이 하루 소임을 다할 때
숨죽인 짐승처럼
보라는 서녘 하늘에 제 거친 숨을 토해 낸다
한 호흡에는 열정을
한 호흡에는 절망을
그 많은 호흡들이 갈 곳을 몰라
때로는 먹구름으로 헤매고
때로는 뜨거움을 바다에 쏟으며 통곡하는 것을
바람은 뜬눈으로 기록한다​


지산동 1975장 마당 높은 집
보라는 자꾸만 디귿자형 마당으로 흘러간다
뭐슬 잘혔다고 워디서 본데없이 햄부러
죽어도 나는 성님이라고 못 불르겄소
기어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그 여자
어허이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던 아버지
불룩한 배를 내밀며 퐁퐁다리를 건너가던
본데없는 년 울 엄마를 몬당허게 본 년
그 팔뚝을 물어뜯지 못한 열세 살 아이​


보라는 도드라진 흉터와 기억들의 불순물
한 열정의 붉음과
한 절망의 푸름과
진흙탕을 뒹굴다 바닥까지 납작 엎드린 후
증오의 순도 깊숙이
염통의 피가 화학적 촉매제로 반응한
보라!
혹자는 애증이라 부른다
조금만 증오를 걷어내면 붉은 기와가 붕어처럼 퍼덕거려
제 처마를 잃어버리는 경계의 위태로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울타리의 배후
지금 코모도 걸음으로
느릿느릿 애증의 저녁이 온다
감정이 녹아 있지 않은 얼굴 위에 흐르는 빛
오랜 기다림 끝에 보라가 운다​


날것의 보라
격렬한 후 쓰리다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문학수첩








봄을 맞이하는 자세 - 정선



어떤 꽃은 증오로부터
어떤 꽃은 교만함으로부터


엄마가, 치매가 왔다
벽을 긁어 대며 꽃들을 의심한다
엄마의 상상 속에서
피다 만 꽃들은 뭉개졌다
내 검은 바람벽에 찬 서리 내려
어깨가 운다
앙다문 입술로 내 바람벽에 기댄 장다리도
봄날을 퍼렇게 운다
저 꽃자리는 제 속 피멍 든 궤적
묵묵히 말을 참은 바람의 시치미


어떤 꽃은 자궁으로부터
어떤 꽃은 늑골로부터


돌아보면 꽃들에게 호흡 한 번 나눠준 적 없고
따스한 눈빛 한 번 얹어준 적 없다
염치없이 꽃숭어리에 뒤늦은 애정을 쏟으려 한
죄, 붉다
슬픈 자궁으로부터 꽃이 피고 웃음이 핀다면
나는 장다리 밭에서 색맹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으로 저리도 환하게 봄이 달려온다면
나는 욕됨을 무릅쓸 것이다


바람이 조용히 몸 바꾸는 소리


야차굼바,
무릎을 꿇어야만 내게로 오는 것들
설산을 기어 다니다 곪아 터진 문장들
꽃으로 너덜너덜하다


봄은
함부로 즐기는 게 아니다


봄은,
몸을 낮춰 굽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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