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벚나무 집 마당 - 정병근

마루안 2020. 4. 5. 19:10



벚나무 집 마당 - 정병근



바람이 집을 비운 사이,

꽃은 방문을 열어

서둘러 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비 끝에 돌아온 바람이

꽃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댄다

꽃의 소문이 마당에 나동그라진다

등을 말아 추궁을 견디는 꽃

외면하며 헛구역질하는 꽃

꽃이 뭘 했는지 모르겠는 바람은

그게 분한 것이다 활짝 피어서

밉고도 두려워라 꽃의 묵묵默默

다그칠수록 내밀한 언약의

괄약근을 더욱 다무는 꽃

제풀에 지친 바람이

가래침을 길게 뱉으며 대문을 나가자

결심을 끝낸 꽃잎들이

ㅍㄹㄹ ㅍㄹㄹ 떨어진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모른다 - 정병근



그 먼 길을,

모르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내게서 떠나간 모든 이별과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몸을


나는 모른다

피고 지는 것들의

그 끝없는 소모를 비바람 눈보라

빗금을 뚫고 건너가던

한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태양을 끌고 가는 개미의 시간과

네게로만 몰려가는 피의 까닭

기억 속 떠나지 않는 얼굴 하나를


나는 까마득하게 모른다

오토바이에 실려 가던 개의 눈빛과

불빛 환한 도마 위의 알몸과

바람에 날려 가던 비닐봉지의 안부를

나는 하나도 모른다






# 정병근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했고, 2001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가 있다.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받았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 이르는 길 - 백무산  (0) 2020.04.05
옥수동 - 박은영  (0) 2020.04.05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 김시종  (0) 2020.04.03
있는 그대로,라는 말 - 손택수  (0) 2020.04.03
노동의 끝 - 이철산  (0) 2020.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