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 김시종

마루안 2020. 4. 3. 19:27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 김시종



무언가 끝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나이 때문은 아니다. 아니 나이가 들었기에

느끼는 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깎고 또 깎은 염가로

마구 다투고 있는

물건. 물건. 물건.

물건에 들러붙은 가난이

풍족함에 둘러싸여 북적대로 있다.

메말라가는 지구의 굶주림도 개의치 않고

남기고는 버리고

막히게 하고 곰팡이를 날리고

자르고 파헤쳐 곰을 헤매게 하고

어디서 어떻게 시절이 어긋난 것인지

꿀벌마저 파견지에 가서 행방불명이다.


소생하는 계절에

올 것이 오지 않는다.

필 것이 피지 않는다.

날아드는 것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잠깨기를 부추기는 처마 끝의 참새.

슬며시 고개 내민 도라지, 금난초

큰구슬붕이.

들길을 즐겁게 해준 떡쑥에 고사리.

지천이어서 눈길도 주지 않던

가까운 것들.

소비로 시달리는 생활의 그늘에서

사라져가는 살뜰한 것들.

어머니,

돌아갈 일 없는 아들을 끝내 기다리며

늙어버린 당신을 생각합니다.

홀로 남겨진 고향에서

쓸쓸히 사라져간 당신이

는에 띄지 않게 된 것들과 함께 보입니다.

싹트는 은혜에 매달렸을 거친 손이

메마른 대지의 갈라진 금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화창하게 바람은 건너가

끝나가는 무언가가

봄 안개 저편에서 어른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다.

저 멀리 분명히

끝나가는 것이 보인다.

뒤섞이고 떠오르며

꽃잎이 춤추고

아아 이 바람과 함께

우리 운명이 불어온다.*



*마지막 두 행은 릴케 <봄바람>의 일부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








4월이여, 먼 날이여 - 김시종



나의 봄은 언제나 붉고

꽃은 그 속에서 물들고 핀다.


나비가 오지 않는 암술에 호박벌이 날아와

날개 소리를 내며 4월이 홍역같이 싹트고 있다.

나무가 죽기를 못내 기다리듯

까마귀 한 마리

갈라진 가지 끝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거기서 그대로

나무의 옹이라도 되었으리라.

세기(世紀)는 이미 바뀌었다는데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보이는 새가

아직도 기억을 쪼아 먹으며 살고 있다.


영원히 다른 이름이 된 너와

산자락 끝에서 좌우로 갈려 바람에 날려간 뒤

4월은 새벽의 봉화가 되어 솟아올랐다.

짓밟힌 진달래 저편에서 마을이 불타고

바람에 흩날려

군경 트럭의 흙먼지가 너울거린다.

초록 잎 아로새긴 먹구슬나무 밑동

손을 뒤로 묶인 네가 뭉개진 얼굴로 쓰러져 있던 날도

흙먼지는 뿌옇게 살구꽃 사이에서 일고 있었다.


새벽녘 희미하게 안개가 끼고

봄은 그저 기다릴 것도 없이 꽃을 피우며

그래도 거기에 계속 있던 사람과 나무, 한 마리의 새.

내리쬐는 햇빛에도 소리를 내지 않고

계속 내리는 비에 가라앉아

오로지 기다림만을 거기 남겨둔

나무와 목숨과 잎 사이의 바람.


희미해진다.

옛사랑이 피를 쏟아낸

저 길목, 저 모퉁이,

저 구덩이.

거기에 있었을 나는 넘치도록 나이를 먹고

개나리도 살구도 함께 흐드러지는 일본에서,

삐딱하게 살고,

화창하게 해는 비추어,

사월은 다시 시계(視界)를 물들이며 돌아 나간다.


나무여, 흔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무여,

이토록 봄은 무심하게

회오(悔悟)를 흩뿌리며 되살아오누나.



*나에게 '4월'은 4.3 사건의 참혹한 달이며, '8월'은 쨍쨍한 해방(종전)의 백일몽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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