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동의 끝 - 이철산

마루안 2020. 4. 2. 22:18



노동의 끝 - 이철산



이 순간이 끝나기를 애태워 기다린 때 있었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보란 듯 떠나고 싶었다

환갑이 다 되도록 허드렛일에 세월 버렸던 그 사내가

공장일 낱낱이 모르는 것 없다는 그 사내가

홀로 삼십 년을 묵묵히 공장을 지켰던 그 사내가

고작 수위실 따위에서 노동의 끝을 추억하는 오늘

야근을 마치고 기계를 세우고 짧은 평화가 스치는 퇴근길

내 노동이 여기서 끝나기를 소원했던 때 있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아름다운 노동을 꿈꾸는 나에게

그 사내 고단했던 노동의 끝을 고스란히 내림하고 갔다

공장일 낱낱이 모르는 것이 없다는 그 사내가

홀로 삼십 년을 묵묵히 공장을 지켰던 그 사내가

고작 수위실 따위에서 노동의 끝을 추억하는 오늘

나는 그 사내의 혹독했던 노동의 세월을 생각한다

폐가 뭉개지고 창자가 썩어 숨을 놓은 그날까지

어쩌면 그 사내 아름다운 노동을 꿈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내 아름다운 노동을 기다렸을 것이다



*시집, 강철의 기억, 삶창








이사 - 이철산



낡은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더부살이로 시작한 살림이건만

하나씩 장만한 것들이 풀어놓으니 짐이다

버려라 가져가자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가득 쌓아놓은 짐 무더기에 쪼그리고 앉아

밤늦도록 작은 시비가 멈추지 않는다

버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밤새워 잡동사니를 풀었다 묶었다 다시 풀었다 묶는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새로 장만하지 못하고

더부살이 낡은 살림이 오롯이 새집을 채웠다

이사하는 날

버려라 필요 없다 천대했던 존재들이

기막히게 자리를 잡았다 낡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낡았다는 기준이 문제였다

낡았다고 부끄러워하던 시간들이 문제였다






*시인의 말

모두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모두가 일하지 못할 때 일을 쉴 수 있는
모두가 일하는 동안 평등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나는 가장 편협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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