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액자, 동백꽃 - 이명우

액자, 동백꽃 - 이명우 액자에서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들린다 헛기침에서 피가 나오고 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부터 액자가 뒤틀어져 있다 중심을 잃어버린 배처럼 한쪽으로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하수도에서 강으로 바다로 흘러 텅 비어 갔다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던 아버지는 벽에다가 동백꽃 같은 점을 다닥다닥 찍어놓다가 어느 날 쿠웅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 틀어졌던 입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정지되어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떨린다 액자를 뚫고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애지 입술 - 이명우 꽃밭에서 날아가던 나비가 발등에 걸리는 늦은 오후 날개의 파문이 꽃잎에 어지럽게 내려앉는다 몽우리를 벗는 소리만 여리게 들리다가 잠긴다 갓 태어난 순간이었다가 가늘게 떨리는 가파른 웃음이었다가 궤도..

한줄 詩 2020.04.28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뭉클해진 건 사월(四月) 탓일까 하얀 꽃잎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정은 나를 놓치게도 한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관람하며 나의 분주(奔走)는 옛일이 되었다 제멋대로 정지해버린 그림자여 자주 그저께보다 멀리 기울어지는 나의 시선이여 인사동 수도약국 앞이었거나 해거름의 시청역 1번 출구였거나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근처 어디였거나 그날들에도 나는 기다림을 발효시키며 길거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을 기다리며 심란하기도 했으리라 길거리에서 누구를 만나 뒷길로 총총 걸음을 옮겼던 저 순간들 내가 닿지 않았던 날들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새삼 가슴이 흐린 건 이미 사라진 것들 때문일까 아직도 곁에 남아 있는 어느새 낡은 것들 ..

한줄 詩 2020.04.28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엄마는 자꾸 도화사거리라고 했다 약국을 말할 때도 도화사거리 약국이라고 했고 도화사거리에 가서 두부를 사 오라고 했다 도화사거리 미용실 골목 안에는 여기인지 거기인지 모르는 분홍이 있었다 생선을 머리에 이고 생산 사세요, 외치며 수많은 골목을 걸었던 엄마의 몸에서 비린내 대신에 분홍의 냄새가 났다 도화사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었다 보이지 않는 도화를 찾으며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골목은 그저 복사꽃 한 잎의 두께만 했다 엄마의 안과 밖 그 사이에 놓인 분홍이 너무나 컸다 여기인지 거기인지 알 수 없는 분홍을 그냥 담고 있었다 분홍분홍 얘기하는 저 사거리 추어탕집 지붕 위로 연 이틀 비가 내렸고 엄마는 도화사거리라는 희미한 말을 남기고 가셨다 나는 사거리의 풍경이 내..

한줄 詩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