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르막 무늬 - 이도훈

마루안 2020. 4. 7. 22:17



오르막 무늬 - 이도훈



사람에게 힘든 길이어서
사람밖에 다닐 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동안 나는
오르막 나이만 먹었다고 여겼다.
가파른 나이였다.
불빛들은 어떻게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까
헉헉거리는 경사로를 끌고 다녔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하고 싶었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은 틀렸다.
높은 곳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 아프다.
부푼 폐처럼 달이 뜨고
어지러운 전선들이 흘러들고 있다.
엉덩이 밑으로 불법주차 스티커가 자주 발부되었다.
그 오르막을 멀리서 보면
넘어진 빗살무늬처럼 보였다.
비스듬하게 와서
넘어진 사람들이 살았다.
더 이상 쓰러질 곳 없는 담장들이
골목에 기대어 있었다
좁은 아랫목의 담당자는 뱀처럼 휘어진
보일러 배관이었고
미지근한 뱀을 업고 출근을 했다.
검정비닐에서 와르르,
미처 줍지 못했던 귤 하나가
지금도 굴러 내려가고 있는
낡은 계단 하나, 기울어져 내려가고 있다.
너무 높이 올라왔다고 믿는다면
숭고한 걸음을 집도하는 이구아나에게
조심스레 내려갈 방도를 물어야 한다.



*시집, 맑은 날을 매다, 도서출판 도훈








목련 - 이도훈



피었다.


중학교 국어 시간,
창문 너머로 뻗은 당신의 손끝에서 하얗게 피었다.


꽃잎 떨어진 텅 빈 교정에서
처음 시가 피었다.


환하게 핀 목련은 몸살이다.
환절기 고열 같은 것,
아랫목을 뒤집어 쓴
불타는 체온이다.


가난했던 날 오후 같은 환한 꽃이
왠지 나는 좋다.


햇살만 검게 그을려갔다.
봄날이 화사한 것은
마당 한켠에 불 지피는 아궁이 같은 목련나무가 있고
빈 솥이 끓여내는 맹물 같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지 않을 듯 하다가도
환절기 감기처럼 알음알음 넘어간다.


아침마다 목련꽃이 핀다.
방문 사이로 봄바람이 분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어서 피고 싶어 달아오른 꽃봉오리다.
봄날은 인생은
약에 취해 몽롱한 오후처럼 빠르니
너무 서두르지 말아라.


목련이 피려는데
자꾸 딴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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