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 불어 너도나도 바람꽃 - 이원규

마루안 2020. 4. 6. 21:15



바람 불어 너도나도 바람꽃 - 이원규



밤의 휘파람을 부니 밤바람이 분다

간절히 바라노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파풍(破風)의 대숲 성난 깃털을 쓰다듬으며

수다쟁이 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래 잊었던 눈짓 손짓의 살가운 부채질

그날 밤 살구나무 아래 꼴깍 침 넘어가던 소리

하릴없이 손가락 관절만 꺾던 소리

부끄러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던

신열의 달뜬 너도바람꽃

삼십 년 전의 봄바람이 불어온다

입술 닿은 자리마다 후끈 열꽃이 피어난다


환갑을 바라보며 속살 깊이 되새기는

변산바람 풍도바람 너도바람 나도바람

만주바람 꿩의바람 홀아비바람 남바람 들바람

세바람 회리바람 태백바람

하많은 내 생의 바람꽃들에게

그래, 나쁜 놈이야 나는, 두 무릎 꺾는다


간절히 바라니 다시 봄바람이 분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그 숲속에서 불던 흙피리 소리 이제야 당도한다

저 바람이 데려오다 흘린 낙엽 하나

오늘 밤은 또 어디에서 잠드는지

흰 목덜미 돌아온 옛 바람들에게

푹 젖은 낙엽의 혀로 안부를 묻는다

네가 바라니 나도 바라는 너도나도 바람꽃

죽을 때까지 제발 죽지 마

애타게 밤의 휘파람을 부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몽유운무화 - 이원규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너무 쉬운 여자는 지루하고

너무 뻔뻔한 남자는 지겨워서

저잣거리는 침침하고

산중 헤매는 것도 심심해서


7년 동안 모터사이클 타고 별종 위기 야생화를 찾아다녔다


바위 뒤에 숨은 아이

산그늘 깊이 무너진 남자

아예 얼굴을 지워버린 여자


안개 치마를 입고 구름 이불 덮어쓴

몽유운무화(夢遊雲霧畵)

저 홀로 훌쩍이는 꽃을 찾아

지구에서 달까지 38만 4300킬로미터


오지의 야생화들이 병든 나의 폐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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