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있는 그대로,라는 말 - 손택수

마루안 2020. 4. 3. 19:23



있는 그대로,라는 말 - 손택수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찬란한 착난 - 손택수



찬을 줄이니 평소의 음식 가짓수에 한둘만 더해도 그날 하루는 내가 나의 칙사다

주말마다 막히는 길을 붕붕거리던 여행을 끊고부터는 도심의 흐릿한 별 하나가 절박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 별 저 별 탐하느라 헤매는 법 없이 오직 단 하나에만 마음을 비끌어 맨다

북한산 아래 지층방에 머물면서부터는 빛을 뼈아프게 실감한다 담벼락 아래 창문으로 직선처럼 땡그랑 떨어지는 빛을 따라 옷가지를 옮겨가며 말리고, 키우던 수선화 분도 뱅글뱅글 자전을 한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골목길은 어떤가 구면인 줄 알았는데 철자가 떨어져나간 가나ㄴ 베이커리, 멀고 먼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가난이었다는 말이지


오늘도 가난을 간판으로 내건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기로 한다 활자 하나쯤은 떨어져나가도 좋은 저 허름한 빵집의 이웃으로






# 손택수 시인은 1970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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