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사과와 양파 - 김이하

사과와 양파 - 김이하 햇살이 들다 고개를 꺾고 기웃거리는 창가에 한 알 남은 사과는 한 달도 넘게 뒹굴거리던 것이고 두 알이 남은 양파는 한 달이 못 된 것이다 국을 끓이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혹은 생으로 먹어치울 식욕도 없이 그렇게 내 삷은 흘러왔던 것이다 사실 그것들이 검정 비닐 봉지에 담겨 삼층으로 마지못해 올라올 때도 뚜렷한 목적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그 창가에 놓였고 햇살이 애를 닳고 목을 꺾게 한, 오히려 그들의 생존이 더 간절하게 똬리를 튼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 간절한 시간들 언덕배기를 오르던 아버지의 굵은 종아리 스러지고 한꺼번에 허물어지던 어머니의 무릎 애인에게서 퐁겨 오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마저 의지가지없던 긴 세월 그러나 삶은 또 한 번 온다 간절..

한줄 詩 2020.03.31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아비께서 강조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되어라. 그것 하나만 지켜도 생을 지킬 수 있으리. 그러곤 덧붙였다. 책상을 바르게 정돈하라. 그것이 어지러워선 안 된다. 그것 하나만 실천해도 모두가 반듯한 사람으로 기억하리. 귀에 못 박힌 이야기. 말씀은 그뿐이었지만 소년은 믿음이 부족했다. 그것의 일 푼조차 새기지 못했다. 때는 늦었다. 책상은 어질러졌고 늦도록 먼 땅을 떠돌고 있다. 눈물이 그칠 새 없다. 여전히 울고 있는 소년, 어떻게 해도 그를 달랠 길 없다. 그러니 내 안에서 울도록 계속 놔둘 참이다.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시와반시 노안(老眼) - 이학성 그가 바뀐 건 다른 인과로 보긴 어렵다. 단지 세월이 부친 경이로운 힘을 받았을 뿐, 그걸 붙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

한줄 詩 2020.03.30

때 늦은 낫질 - 최정

때 늦은 낫질 - 최정 긴 폭염에 갇혀 밭둑 낫질은 엄두도 못 냈다 때 늦은 낫질은 힘에 부친다 단풍이 발자국을 찍으며 성큼성큼 한 걸음씩 내려오는 가을, 계곡 아래까지 가을빛이 그득하다 심장의 피를 뽑아 마구 뿌려 놓은 것처럼 붉은 단풍이 발길을 잡아끈다 낫을 던지고 아예 밭둑에 앉아 버렸다 야속하게 그리 서둘러 붉어질 일이냐 그리 아름다운 비명 지를 일이냐 첫눈에 물들어 잊히지 않는 사랑도 있더라 *시집, 푸른 돌밭, 한티재 빛 - 최정 골짜기 끝에서 환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홀로 늙어가도 서럽지 않을 만큼 아늑했다 첫해 농사를 짓고서야 알았다 환한 빛의 정체는 밭 전체를 덮었다 노랗게 마른 바랭이 풀 초보 농부를 비웃듯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집요하게 밭을 점령해 갔다 뽑다 지쳐 콩밭이 아예..

한줄 詩 2020.03.29

꽃구멍 - 이봉환​

꽃구멍 - 이봉환 ​ 우리 눈에는 그저 언젠가 때가 되면 피는 것이겠지만 동백에게는 얼마나 많은 힘이 끙, 끙, 필요했던 것일까 가지 끝의 여린 눈으로 꽃잎을 밀어내려 애쓴 흔적이 꽃봉오리 붉음에 스며 있네 때가 되면 우리 마음에도 봄이 오가고 또 당연히 그러는 것이겠지만 저들의 삶은 저리 안간힘이네 겨우내 동백은 잠 한숨 못 잤을 것이리 푸르던 잎이 거뭇거뭇해진 것 좀 봐! 똥 누듯 힘쓰느라 시퍼레진 저 낯빛을 좀 보라구! 어머니에게서 내가 나왔네 그 구멍들에서 나온, 너무나도 커다랗게 자라버린 저잣거리의 저놈들을 좀 봐! 밀어내느라 애쓸 만한 저 꽃들을 좀 보란 말이야! *시집, 응강, 반걸음 내 귀하고 늠름하고 어여쁜 - 이봉환 어쩌다가 내가 나로 태어나서 어느 곳을 흐르다가 한 귀한 여자를 만나고..

한줄 詩 2020.03.29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밤새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서둘러 낯을 씻는다. 아직은 이른 봄, 시린 손끝으로 어젯밤 아내의 한숨 소리가 파고든다. 밀리고 쫓겨 올라앉은 산동네 높은 것도 복일까 해마다 올려달라는 월세금은 냉수 한 사발을 부르고 쫓기듯 쪽문을 나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골목마다 이른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웨딩샵 쇼윈도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눈꽃 같은 드레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침침한 눈으로 살펴본다. 아무리 셈을 해도 알 수 없는 숫자다. 칼 한 자루 날을 세워야 고작 삼천 원 오천 원인데 옷 한 벌의 가격만큼 날을 세운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아하! 여기는 강남이요 압구정이란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해도(海道) - 백성민 그의 하루는 칼을 가는..

한줄 詩 2020.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