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오우아, 나는 나를 벗 삼는다 - 박수밀

이 책의 저자 박수밀 선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고전을 쉽게 해석해서 대중적인 문장으로 쓴 저서를 몇 권 내기도 한 부지런한 학자다. 나를 벗 삼는다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럼 이 제목을 어디서 가져 왔을까. 雪之晨 雨之夕 佳朋不來 誰與晤言 試以我口讀之 而聽之者我耳也 我腕書之 而玩之者我眼也 以吾友我 復何怨乎! 눈 오는 밤이나 비 오는 밤에 다정한 친구가 오지 않으니 누구와 얘기를 나눌까?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요, 내 손으로 글씨를 쓰니 구경하는 것은 나의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다시 무슨 원망이 있으랴! 나를 벗 삼는다는 문구는 물질만능 시대에다 난데 없는 코로나 시기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저절로 부자가 되는 재벌 자제가..

네줄 冊 2020.09.18

아파트 민주주의 - 남기업

독특한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다. 한국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가 전체 주택의 50%를 넘어서면서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집 하면 이제 아파트를 먼저 떠올린다. 예전의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는 집을 그리라 하면 지붕부터 그렸지만 지금은 네모부터 그린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변하면 자연히 풍경도 바뀐다. 가장 먼저 골목길이 없어졌고 마당도 없어지고 빨랫줄도 장독대도 꽃밭도 없어졌다. 공기정화를 위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식물학대에 해당한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양 아래 있을 때 행복하다. 사람 입장이 아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칸칸이 단절되어 있는 아파트는 반환경적이다. 외국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파트에 살지만 우리는 반대다. 속칭 영끌로 아파트를 사서 그 빚을 갚느라 평생 ..

네줄 冊 2020.09.16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 이운진 시집

가능하면 천년의시작에서 나온 시집은 빼 놓지 않고 읽는다. 모든 시집을 내 것으로 만들 순 없지만 애정을 갖고 주목하는 출판사다. 만든 이보다 쓴 이에게 더 눈길을 줘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메이저 출판사 빼고 가장 활발하게 시집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가끔 함량미달의 시집을 만날 때면 난감하지만 그건 시 읽기에 미숙한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난감함을 무심함으로 바꾸고 나와 인연이 없는 시인이려니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된다.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경계 또한 하늘에 긋는 선처럼 모호해서 부질없다. 그저 나는 아무 감명이 없고 가슴에서 헛돌기만 하는 시를 열심히 해설하는 평론가들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시 읽는 기술도 있는 모양이다. 이 시집은 지나쳤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시집이다. 내가 만든 표현으로는..

네줄 冊 2020.09.08

소수자들의 삶과 기록 - 윤수종

세상엔 존재하지만 없는 듯 취급 받는 사람이 있다.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다수자에 밀려 소외 받거나 차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윤수종 교수는 오랜 기간 소수자들의 삶을 기록한 연구자다. 이런 연구일수록 빛이 안 나기 마련인데 꾸준하게 이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학문을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남이 안 가는 길을 걷는 일이 고단하기는 해도 이런 학자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소수자들의 삶을 기록한 내용이다. 탈성매매 여성, 병역거부자, 영창근무자와 수용자, 장애인, HIV 감염인, 성소수자 부모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별히 소외 계층에 관심이 없으면 잘 읽히지 않은 내용이다...

네줄 冊 2020.09.07

근대 장애인사 - 정창권

참 좋은 책 읽었다. 이런 책이 많이 팔릴 리 만무하고 또 연구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1등보다 2등에 더 눈길이 가고 주류보다 비주류의 길을 걷는 사람을 좋아한다. 모두가 인싸가 되기 위해 몰려다니지만 세상엔 인싸만 사는 것이 아니다. 지은이 정창권 선생은 장애인 연구를 오래 하신 분이다. 예전에 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후에도 몇 권의 좋은 책을 냈으나 이 책 외엔 읽지 못해 아쉽다. 어쨌든 이 책은 장애인 연구의 결정판이랄 수 있다. 불경과 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모두 소중하건만 실제 그렇던가. 이 책은 옛 문헌에 나온 장애인 기록과 근대에 들어 더욱 핍박 받으며 살았던 그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호칭은 최근에 만들어졌다. 1900..

네줄 冊 2020.09.03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 강준만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나온 책이다. 읽어야지 했다가 뒤로 미뤘는데 뭐든 그렇지만 책도 한 번 미루면 읽을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칠 전 알라딘 헌책방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반값도 안 되는 가격의 새책 같은 헌책이다. 이 책은 지난 4월에 나오자 마자 조선일보가 마치 특종처럼 책 소개를 대서특필해서 화제였다. 문재인 정부가 망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신문사가 조선일보다. 게다가 당시 총선도 며칠 안 남았겠다 얼씨구나 했을 것이다. 그것도 조선은 신문 1면에다 단독이라며 이 책을 소개했는데 이런 사례가 있었는가 싶다. 덕분에 이 책은 손 안 대고 코풀 듯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다. 1면까지 할애해 서평을 한 조선일보 요지는 이렇다. 강준만 같은 진보 지식인도 문재인 정부..

네줄 冊 2020.09.01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고영

이 책을 읽고서 카스테라 빵을 사 먹었다. 잊고 있던 빵인데 실로 오랜만이다. 어릴 적 워낙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군것질을 모르고 살았다. 잘 사는 집 친구가 붕어빵 꼬리를 잘라 주면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며 넙죽 받아 먹던 아이였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행여 장난으로 침을 묻혀 주었어도 받아 먹었을 것이다. 신문 배달, 음식점 알바 등, 일찍부터 스스로 용돈을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가끔 사 먹던 간식이 카스테라였다. 빵 밑에 깔린 종이에 묻은 카스테라를 이빨로 긁어 먹었다. 태생이 천해서일까. 중년이 된 지금도 식탐이 있다. 막 스무 살 넘긴 무렵, 알바로 노가다를 따라다닌 적이 있다. 식당 알바보다 훨씬 힘들었으나 돈을 더 많이 받는 이유다. 도배를 하는 팀을 따라 다녔는데 경력은 일천하나 가..

네줄 冊 2020.08.30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 정만춘

제목이 특이해서 고른 책이다. 출판계도 불황이어선지 제목으로만 낚고 내용이 부실한 책들이 넘쳐나는데 이 책은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내용물 또한 아주 흥미로웠다. 이 책은 네 명의 연인과 살아 본 동거의 기록이다. 저자 정만춘은 여자다. 일부러 남자 이름처럼 지은 예명같이 보이지만 본명인지도 모른다. 제목을 본 후 내용물에 앞서 날개에서 약력을 살폈다. . 폴리아모리? 이 단어에 막힌다. 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데 뜻을 명확히 알자 책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책 제목에 낚인 게 아니라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정만춘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고 약력만 보고 그녀를 섹X이라 생각했다. 남자 밝히는 여자를 섹X이라 하기에 이 단어는 청소년 보호에 들어가 있다..

네줄 冊 2020.08.29

외롭지 않을 권리 - 황두영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일상 대화에서 말문이 막힐 때나 부당함을 당할 때 "그런 법이 어딨냐?"는 말을 한다. 사회가 변하고 삶이 다양해지면서 없는 법도 필요한 시대다. 휴대폰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것처럼 이것도 일종의 사회 진화의 과정이리라. 아직 생활동반자법이 도입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법도 통과는 커녕 차별금지법처럼 언급이 될 때마다 찬성과 반대의 극한 대립으로 사회 논란으로만 그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도입될 법이지만 갈 길은 먼 법이 아닐까 싶다. 폐지가 되면 가정 근간이 완전히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이나 , 등도 오랜 기간 논란 끝에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는 간통죄를 엄히 다스리고 심지어 ..

네줄 冊 2020.08.27

죽음을 배우는 시간 - 김현아

참 좋은 책을 읽었다. ,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의사협회가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업을 예고하며 정부와 대립하는 시기였다. 그동안 여러 문제로 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의사협회가 의대생 정원을 늘리는 문제로 더욱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정부 정책에 동의한다. 이 책의 저자는 현역 의사다. 나는 언제가부터 의사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저자가 글도 잘 쓰고 개념 있는 의사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 가본 놈과 안 가본 놈이 싸우면 안 가본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많은 분야에서 이론으로 무장한 얄팍한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며 대중을 현혹하는 돌팔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죽음을..

네줄 冊 202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