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붉음이 제 몸을 휜다 - 김유석 시집

오늘도 좋은 시를 건지기 위해 그물망을 촘촘하게 친다. 아까운 시 빠져 나가면 다시 만날 길 요원하다. 세상의 모든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 읽는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 읽기도 누가 시켜서 숙제처럼 읽는다면 금방 싫증이 난다. 자발적 시 읽기는 좋아야만 오래 지속할 수 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저렴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서 시 읽기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일찍 부모 품을 떠나야 했지만 피와 살을 준 어머니와 문자를 깨우쳐 준 초등학교 선생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도서출판 상상인, 시집을 내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출판사다. 요즘 메이저 출판사 빼고도 좋은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몇 있는데 상상인 시집은 처음이다. 어쨌든 출판 불황기에 시집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몇..

네줄 冊 2020.12.08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시집

시집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가 손에 넣은 시집이다. 내가 사랑하는 신촌의 홍익문고다. 최근 외관을 단장했지만 여전히 승강기가 없어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해서 더 좋은 아날로그 서점이다. 지난 11월 내내 이 시집과 함께 했다. 읽다가 창밖을 보며 첫눈이라도 내렸으면 하게 만드는 시집이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 출생이니 팔순을 훌쩍 넘겼다. 선생은 참 많은 시집을 낸 원로 시인이지만 그의 시집을 며칠 동안에 걸쳐 온통 몰입해서 읽은 것은 오랜 만이다. 돌아 보면 황동규 시인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 뭣도 모르고 간 군대에서 황동규 시인을 알았다. 몇 달 앞서 입대한 선임이 시집을 여럿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없이 놀기만 한 청춘이었기에 시를 맛도 모르고 먹는 음식처럼 읽었다. 그중 오..

네줄 冊 2020.12.07

생은 아물지 않는다 - 이산하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돌림병으로 온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 비행기가 멈추면서 항공사와 여행사에서 밥벌이를 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실업자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가을이 왔고 더디게 왔던 가을도 서둘러 떠났다. 나는 이때쯤이 정서적으로 가장 우울하다. 해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세 번의 고비가 있다. 봄이 꽃샘 추위와 힘겨루기를 하는 3월 말은 비교적 밝은 정서다. 반면 처서 지나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한 8월 말, 그리고 가을이 겨울에게 밀려나는 11월 말은 우울해진다. 딱 지금이 그렇다. 올해는 유독 일찍 겨울이 찾아왔다. 이산하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기간 시를 쓰지 않고 있고 책을 자주 내지 않기에 그의 글은 귀하다. 이산하의 문장에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처럼 쓸쓸함이 묻어난다. 무거운 주제..

네줄 冊 2020.11.30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 홍지호 시집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중에 창비와 문학동네 시집은 가능한 들춰보는 편이다. 들춘 열 권 중에서 두 권은 골라 읽어야지 하는 목표를 세웠지만 번번히 빗나간다. 하긴 내 인생이 어긋남의 연속이었으니 책 읽는 목표 빗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나의 책 읽기는 우물 안 개구리에 수박 겉 핥기 식의 용두사미였다. 한때는 이런 얕은 지식을 뽐내지 못해 안달이 났다. 아는 체를 위해서 때론 과장도 했고 목차만 보고 다 읽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자랑질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것마저 시들해졌고 나에게 혼잣말처럼 웅얼거린다.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오십대라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연륜을 믿지 않는다. 그걸 내가 증명하고 있다. 하늘의 뜻을 알고 나서 조만간 귀가 순해져야 할 텐데 나는 해당사항이 ..

네줄 冊 2020.11.28

저 달, 발꿈치가 없다 - 박윤우 시집

약력을 보고 시집을 선택할 때가 있다. 박윤우 시인은 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선생질도 좀 하고 중등학교 미술교사도 했다. 이후 미술학원을 오랜 기간 운영하며 밥을 빌었다. 죄가 많아 시를 쓴다는 시인의 약력이 인상적이다. 시집 코너 기웃거리다 우연히 만난 시집이지만 문장에 홀딱 빠졌다. 첫장에 실린 약력을 읽은 선입견 때문일까. 문장 곳곳에서 곱게 늙은 중후함이 느껴진다. 실제 시인은 환갑이 훨씬(?) 지난 2018년에 신인상을 받으며 늦깎이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오랜 내공 때문인지 시에서 힘이 느껴진다. 운율감이 없는 싯구에서 눈과 입에 착 달라 붙는 밀도감이 찰지다. 쫄깃쫄깃한 시라고 할까. 자신만의 문장력으로 개성을 발휘하며 가독성을 배가 시킨다. 처음엔 빠르게 읽었다가 두 번째에 천천히 읽어보면..

네줄 冊 2020.11.27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 배정숙 시집

코로나 때문에 서점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1.5단계니, 2단계니 하지만 나는 스스로 3단계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밀집 장소에 가능한 가지 않는 것, 커피집 안 가고 술집 안 간 지가 까마득하다. 처음엔 다소 답답하고 무력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워낙 적응을 잘 하는 편이라 이제는 단련이 되었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잡초처럼 살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이겨낸다. 뭐든 맘 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사는 집이 조금 넓었으면 했다가도 예전에 한 방에서 다섯 명이 다닥다닥 누워 자던 생각을 하면 지금은 대궐이라 여기며 위안을 삼는다. 언제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비싼 음식점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경제력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사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책 읽는 행복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

네줄 冊 2020.11.26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김희준 시집

아마도 기형도 시집부터였을 것이다. 유고 시집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 한쪽에 서늘함이 생긴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 덮어 놓고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도 유고 시집과 딱 어울린다. 책 날개에 시인의 말이 단촐하다. 9월 10일은 시집이 나온 날이나 그는 세상에 없다. 시집은 지난 7월에 세상을 떠난 그의 49재에 맞춰 나왔다. 1994년 출생이니 스물 여섯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먹먹하다. 하늘이 시인의 재능을 질투했을까. 오래 전 신기섭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딱 이 생각을 했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질투해서 일찍 데려갔다고,, 2005년에 세상을 떠난 신기섭 시인도 공교롭게 스물 여섯이었다. 그는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재능있는 젊은이였다. 어쨌든 이름이 남성처럼..

네줄 冊 2020.11.22

원자력발전의 사회적 비용 - 김해창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 수명 지난 원전 처리 등 탈원전 문제로 갑론을박을 할 때부터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책 욕심이 많아 읽고 싶은 책은 밀려 쌓이고 시간은 없고, 그러다 보면 못 읽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 늘 아쉽다. 이 책은 실천하는 참 지식인 김해창 교수의 신간이다. 그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 한 권만으로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환경정책의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예전의 쓴 책 에서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 했다. 이 책도 탈원전 에너지 정책이 왜 필요한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외국 사례와 한국을 비교하고 이전에 일어났던 원전 사고와 일어날 위험성을 일깨운다. 지금부터 탈원전 정책을..

네줄 冊 2020.11.20

독립출판의 왕도 나의 작은 책 - 김봉철

얼마전에 헌책방에서 이 사람의 책을 처음 만났다. 다. 내 인생이 저렴하기 짝이 없는 삼류 인생이라 이런 책 제목이 눈에 더 들어온다. 책의 외관이 다소 성의 없어 보였지만 제목 때문에 읽은 것이다. 오래전에 일기처럼 끄적거린 내용인데도 공감이 갔다. 대번에 외로움 타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글을 읽으며 몇 가지 촉이 왔다. 김봉철도 본명이 아니겠구나. 사연도 조금 각색을 했겠구나. 인연이란 게 묘해서 몇 달 후에 헌책방에서 를 발견했다.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제목 보고 골랐는데 김봉철의 책이다. 책도 내용물도 조금 세련된 느낌을 받았다. 픽션을 보탰겠지만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글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서점 신..

네줄 冊 2020.11.15

11월 28일, 조력자살 - 미야시타 요이치

2018년 11월 28일, 다계통 위축증(MSA)을 앓던 50대 일본 여성 고지마 미나가 스위스 바젤에 있는 에서 숨을 거둔다. 라이프서클은 스위스 의사 가 만든 단체로, 지난 2011년 설립된 이래 매년 약 80건의 안락사를 진행해왔다. 이 책은 제목만 보면 언뜻 소설처럼 생각 되나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가 쓴 책이다. 2018년 8월 미야시타는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다계통 위축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고지마 미나가 보낸 편지다. 자신의 병을 잘 알기에 병세가 더 악화되기 전에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 가서 죽고 싶다는 편지였다. 다계통 위축증이라는 병은 진행성 질병으로 몸 안의 근육이 점차 쇠약해지다가 죽음을 맞는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결국 침도 삼킬 수 없..

네줄 冊 202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