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건강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드디어 배신 시리즈가 또 나왔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늘 좋은 책을 낸다. 예전에 읽은 노동의 배신은 추천하고 싶은 명저다. 그 외 희망의 배신 등을 써서 나를 매료시켰다. 이 책도 좋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힘은 저자의 문장력에 있다. 문학적인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이다. 교양서란 바로 이런 책이다. 내용, 디자인, 적당한 책값 등이 잘 조화를 이뤄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저자는 1941년 미국 출생의 여성 작가다. 세포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도시 빈민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NGO에서 일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섰다.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 문제를 다룬 노동의 배신을 시작으로 사회 곳곳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명저를 남겼다. 있는 자, 가진 자, 배부른 자에겐 두려운 저격..

네줄 冊 2020.11.11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 정기복 시집

지나쳤던 시집을 다시 만났다. 시집 고르는 내 안목을 비교적 신뢰하는 편인데 놓친 시집을 다시 만났을 때는 내 선입견을 반성한다. 지나치게 제목에 집작하는 것도 있다. 서점에 가지 못할 때 출판사 홍보 기사만 보고 덥썩 주문할 때도 있다. 별로 공감이 안 가는 내용물 부실한 시집을 만날 때는 내 선택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남의 추천을 참고할 필요는 있어도 서평이나 보도에서 어렵게 설명한 책은 펼치고 난 후 대부분 후회를 한다. 그래서 스스로 꼼꼼하게 골라 천천히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책은 올 봄에 우연히 헌책방에서 만났다. 어디에서든 꽂혀 있는 시집은 가능한 펼쳐 보는 것이 오랜 습관이다. 맨 앞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고는 바로 결정했다. 딱 절반 값에 산 새책 같은 헌책이다. 누가 이..

네줄 冊 2020.11.08

연꽃십자가 - 손원영교수 불법파면시민대책위원회

2016년 1월 경북 김천에 있는 개운사의 불상이 파괴된 사건이 있었다. 어느 60대 기독교 신자가 법당에 난입해서 불단에 놓인 불상 등을 훼손한 것이다. 이유는 불상이 우상숭배라는 거였다. 제지하는 스님을 밀치며 마귀라 소리치기도 했다. 불상 훼손 사건 다음 날 서울기독대학교 손원영 교수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신학대 교수들이 신학생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며 불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사흘 뒤에 개운사 법당 회복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한다. 이 모금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참여하며 손교수를 응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17년 2월 서울기독대학교 이사회는 이 대학에 18년간 재직한 손원영 교수를 파면했다. 이유는 '그리스도교회 신앙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언행..

네줄 冊 2020.11.07

정치의 품격 - 정도상

소설가 정도상의 책이다. 지금은 소설을 거의 안 읽지만 예전에 소설을 열심히 찾아 읽을 때 정도상의 소설 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꽤나 인상 깊은 소설이었음은 확실하다. 작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아픈 주제를 가지고 선이 굵은 소설을 많이 남겼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설이지만 오래 기억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고 세종실록을 바탕에 깔고 세종의 통치에서 발견한 정치의 품격을 말하고 있다. 품격은 일상에 자주 쓰는 단어다. 신사의 품격, 아버지의 품격, 나라의 품격 등 어디에 갖다붙여도 고상한 말이 되는 단어다. 정치의 품격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것이 정치의 품격 아닐까. 정도상 작가는 세종에게서 정치의 품격을 발견한다. 세종 이후..

네줄 冊 2020.11.06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 양상규

작년 가을 경주에 갔을 때 이 서점을 갔다. 책을 사러 간 게 아니라 그냥 황남동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북적대기에 잠깐 기웃거려 봤을 뿐이다. 들어가진 않았다. 이런 서점이 내 취향도 아닐 뿐더러 서점엔 책 사러 가는 곳이지 사진 찍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행을 갈 때면 꼭 시집 한두 권은 챙긴다. 나의 여행은 걷는 경우가 많다. 경주 여행도 가능한 걸었다. 명소가 많은 경주지만 걸을 때만이 보이는 풍경이 있다. 걷는 여행에는 최대한 배낭이 가벼워야 하기에 단추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 여행길 동행 책은 단연 얇은 시집이 최고다. 무게도 덜 나가고 반복해서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그 여행길 내내 한 시인의 시에 푹 빠질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당연히 꼼꼼하게 고른다. 싯구에 깊이가 있을 것, 반..

네줄 冊 2020.11.03

착취도시, 서울 - 이혜미

한국일보 이혜미 기자가 쓴 책이다. 이라는 강렬한 제목이 끌리기도 했지만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주거 문제를 다뤘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궁둥이로 쓴 책이 아닌 발로 쓴 책이어서 더욱 생생하게 읽힌다. 가난한 사람의 주거문제 내막을 제대로 파헤쳤다. 지옥고라는 말이 있다. 빈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합친 말로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택을 일컫는다. 복지 차원에서는 개선이 되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곳마저 없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라면 박스 들고 서울역 지하도로 가야만한다. 가령, 창문도 없는 좁은 고시원이 월세 25만 원이라 치자. 최저 주거 복지를 위해 창문을 달고 방도 조금 넓혀서 35만 원을 내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씨구나 반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라리 환경이 열악해도 더 저렴한 방을..

네줄 冊 2020.11.01

커피 한잔 할까요? - 허영만 만화

나는 영국에서 꼬박 14년을 살았다. 햇수로는 15년이다. 영국에 살면서 맛을 알게 된 음식들이 있다. 치즈, 와인, 초콜릿, 커피, 그리고 빵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커피 외에는 거의 접하지 못했거나 먹어도 드문드문 맛보는 정도였다. 빵이야 생존을 위해 먹다가 맛을 알게 되었으나 다른 것들은 그 곳 문화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것이다. 영국에 사는 동안 특히 와인과 치즈에 빠져 살았다. 안 먹는 날이 드물 정도로 거의 매일 먹었다. 저렴한 와인 위주로 마셨지만 말이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와인과 치즈가 엄청 싸다. 와인뿐인가. 빵, 우유, 달걀, 육류, 과일, 야채 등 기초 생활 물가는 영국이 한국의 절반 값 정도다. 특히 양파나 감자, 당근 값은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신..

네줄 冊 2020.10.30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 안상학 시집

안상학 시인의 시집이 나왔다. 그간 시집 내는 주기를 알기에 조만간 나오겠지 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 시집도 실천문학사에서 나올 거로 봤는데 이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출판사는 이름도 특이하지만 좋은 시집을 많이 낸다. 시집도 인연이라는 것이 있어서 찾아 나서야 연결이 된다. 출판사 걷는사람과는 비교적 연이 잘 닿는 모양이다. 안상학 시집이 여기서 나온 스물일곱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부터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첫 인연을 못 잊는 성격 탓이다. 그러나 출판사가 시기에 맞춰 시인 선정을 잘 하기에 이런 인연도 생긴다. 누구의 추천이나 광고는 참고만 할 뿐 스스로 찾아 나서 책을 고른다. 안상학 시집은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기다렸던 시집이기도 하거니와 평소 그가 어떤 시를 쓰는지 알고..

네줄 冊 2020.10.28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봄날

이 책은 성매매 여성의 이야기다. 출판사로부터 도움을 받았겠지만 본인이 직접 썼다. 몸 파는 여자. 흔히 창녀라고 부른다. 그래서 본명이 아닌 봄날이라는 가명을 썼다. 20년 동안 몸을 팔았다. 작가의 글발에 놀아나는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저자가 불분명한 책이 부지기수다. 독립 출판이 특히 그렇다. 언론 기자가 실명과 자존심으로 책임 지는 보도를 해야하듯 책도 마찬가지다.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심지어 정체성마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 책은 성매매 여성이어서 가명임을 이해하고 읽었다. 성매매 여성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고 한다. 몸을 파느니 차라리 마트에서 일을 하던지 식당에서 서빙을 해도 먹고 살 수는 있지 않느냐, 뭐 이런 얘기다. 그 말에는 편하게 돈 벌려고..

네줄 冊 2020.10.22

얼마간은 불량하게 - 조하은 시집

어렸을 때부터 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옆 마을인 친구 집에 놀러 갈 때가 많았다. 친구네는 엄청 부자였다. 친구 엄마는 내게 자주 와서 아들과 숙제도 하고 놀다 가라고 했다. 친구는 잘 사는 데 반해 공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한 교실에 보통 60명 남짓 있었다. 출석 확인도 이름보다 번호를 불렀다. 시험을 보고 나면 담임이 성적을 불러 주었는데 50 등 내외였던 그 친구가 38 등을 했다고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난다. 나는 학창 시절 늘 1, 2등을 다퉜고 3등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친구는 필기구도 고급이고 전과와 수련장이 가득했다.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친구 엄마가 가루를 탄 오렌지 주스와 가끔 과자도 주었다. 그것 얻어 먹는 재미도 있지만 친구 방에 가득한 세계문..

네줄 冊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