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파트 민주주의 - 남기업

마루안 2020. 9. 16. 19:33

 

 

 

독특한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다. 한국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가 전체 주택의 50%를 넘어서면서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집 하면 이제 아파트를 먼저 떠올린다. 예전의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는 집을 그리라 하면 지붕부터 그렸지만 지금은 네모부터 그린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변하면 자연히 풍경도 바뀐다. 가장 먼저 골목길이 없어졌고 마당도 없어지고 빨랫줄도 장독대도 꽃밭도 없어졌다. 공기정화를 위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식물학대에 해당한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양 아래 있을 때 행복하다.

 

사람 입장이 아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칸칸이 단절되어 있는 아파트는 반환경적이다. 외국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파트에 살지만 우리는 반대다. 속칭 영끌로 아파트를 사서 그 빚을 갚느라 평생 허리가 휜다. 

 

그래도 아파트가 있으면 가만 있어도 재산이 증식된다. 영혼이 휘든 허리가 휘든 어쩌면 이 맛이라도 있어 기를 쓰고 아파트를 마련하는지 모른다. 자가로 살든 전월세로 살든 절반 넘은 주택이 아파트인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임은 부인하지 못한다.

 

이 책은 아파트에 사는 한 시민이 얼떨결에 회장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앞 부분에 저자는 이런 글로 시작한다. <아파트 시세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아파트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맞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특성상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는 회장이 되면서 전임 회장을 비롯한 관리소장이 복마전 같은 정책을 벌여왔음을 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전임 회장 일행과 새 회장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런 것도 있었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아파트에도 적폐세력이 또아리를 단단히 틀고 있다는 것이고 많은 아파트 입주민들이 그걸 알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리비 몇 만원 더 내고 말지 머리 아프게 회장과 관리소장이 하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유권자가 감시의 눈이다. 다음 선거에서 표로 심판하는 유권자가 무서우면 정치인이 허튼짓을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적폐세력의 저항과 음모가 얼마나 단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사회든 아파트 관리든 개혁이란 그만큼 힘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저항 세력의 온갖 음해와 모략과 심지어 모욕까지 견뎌야 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기득권 적폐세력에 지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인내심을 발휘해 결국 1800 세대 가까운 단지의 아파트 민주주의를 일궈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들의 죽음과 피를 희생해야 했던가. 이 책에 나오는 아파트 민주주의인들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말미에 회장과 관리소장이 각자의 업무를 침범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을 현실로 만들려면 아파트 관리소장에 대한 임면권을 지자체가 가져야 하고 명백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관리소장의 규정된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리소장의 임면권을 아파트 회장에서 지자체로 옮기면 부정을 저지르기가 쉽지 않다.

 

마을에 이장이나 동장이 있고 그 밑으로 통장과 반장도 있다. 아파트에도 동대표가 있고 회장이 있다. 알아서 잘 하겠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사라면 동네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무협지 읽듯이 정의로운 아파트 회장의 분투기를 흥미롭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