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무릎의 인력 - 고태관

무릎의 인력 - 고태관 마주 놓인 의자 사이가 좁다 닿지 않으려고 허리를 세워 앉는데 눈이 마주치고 기차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거 알아요 터널 속에서 말을 건네 온다 분명히 아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점점 흐려질 거예요 달리는 시간만큼 멈춰야 도착할 수 있어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승객도 없는 간이역 차창 밖 안개가 터널 입구처럼 멎어 있다 스르르 감긴 눈이 출구 없는 잠결 속으로 달려갔다가 차창 턱에 기댄 팔의 각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꺼풀까지 따라온 어둠이 마른 입술에 묻어나곤 했다 곧 종착역이에요 앞질러 갈 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서행하는 것도 오래 들이마신 숨을 서서히 내쉬는 일 캄캄한 동굴을 헤쳐 나오느라 연착된 몇 분 정도는 터널을 벗느라 지불한 빈틈인 거죠 가볍게 부딪혀 오는 무릎 정..

한줄 詩 2021.08.27

미장센 - 윤의섭

미장센 - 윤의섭 꿈속에선 공원 벤치에 앉은 아이의 뒷머리가 있었다 꿈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였는데 왜 거기 앉아있었을까 허름한 골목 폐타이어 화분에 핀 채송화를 슬쩍 스쳐가는 바람은 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단역배우처럼 서툰 벽화는 꼭 서툴러야 했고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에겐 기억나지도 않을 오후겠지만 그래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기적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종말들 악몽을 꿨는데 아이의 뒷머리가 또 놓여있었다 채송화는 시들어 죽었고 그 곁으로 바람은 여전히 불어야만 했다 산 너머에선 천둥치며 비구름이 몰려오고 나는 얼마나 잠깐 화창했던 생물이었던 걸까 비가 오기까지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음력 - 윤의섭 ..

한줄 詩 2021.08.27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 황중하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 황중하 깜박이던 불빛이 사라지고 조금씩 나도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덧 나는 너무 많은 젊음을 소모해 버렸다 비닐에 포장된 채로 꽃잎이 시들어가고 있다 숨 한번 크게 쉬어보지 못한 채 꽃은 벌써 말라가고 있다 그렇게 이번 나의 생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태양 속을 내일은 다시 건널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아카시아 향기를 남긴 채 사라지고 나는 향기로운 죽음의 냄새를 음미한다 누구의 손도 잡지 않는다 상처가 두려우므로 상처가 두렵지 않으므로 죽어가고 있음을 매번 확인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 생을 퇴고하기 전 내가 할 일은 나를 애워싼 비닐 포장을 벗고 숨 한번 크게 쉬어보는 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시집/ 아직 나는 당신..

한줄 詩 2021.08.27

가족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주세요

[2021 무연고사 리포트]'가족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시아경제 특별취재팀=고형광 팀장, 유병돈 기자, 정동훈 기자, 이정윤 기자] ‘가족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 주세요.’ 서울에 거주하는 이숙자(74·여·가명)씨는 스스로를 잠재적 무연고자라고 news.v.daum.net # 우연히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딱 그짝이다. 가족과의 불화가 심했던 콩가루 집안이기에 이런 기사가 더욱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사연 없는 사람 없다지만 세상엔 참 기 막힌 사연이 많다. 누군가는 오죽하면 이랬을까 공감을 하거나, 또 누군가는 그래도 가족인데 하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할 것이다. 나는 오죽하면 그랬을까다. 자기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여겼던 일이 불쑥 생기는 것이 인생사다...

열줄 哀 2021.08.27

신빙과 결속 - 서윤후

신빙과 결속 - 서윤후 싸움이 끝난 뒤 깨진 화병은 누가 치우나 남겨진 사람은 조심성 없이 쓸어 담고 집 잃은 새를 보듬듯 꽃을 주워다 종량제 봉투 앞에 서게 될 때 그렇게 향기가 스민 어둠은 왜 밤새 사라지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생각하면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눈감으면 비로소 눈뜨는 화병에 베인 손날의 붉은 눈 유월의 신호위반 딱지가 팔월에 날아온다 빙빙 돌려서 하게 되는 말은 멈춰야만 알 수 있는 팽이의 표정 같아 어둠이 붙잡아둔 빛과의 일화 바깥은 어떻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 잠시 멈춰 서면 보이는 것이 있고 휘몰아쳐서 뒤섞인 모든 풍경이 검정으로 갈 때 나는 섞이지 못한 색깔처럼 분명해지고 나를 바라보는 종려나무 한 그루가 물 한 번 준 적 없는 내게 눈동자 위로 흐..

한줄 詩 2021.08.26

손도장 - 김가령

손도장 - 김가령 오래전부터 발소리가 띄엄띄엄 흘러왔다 한때 그도 기계식 앞에서 잠시 흔들렸다 수전(手顫)의 순간이 올 때까지 손을 고집했다 그를 끝까지 지켜본 건 가게 앞 은행나무였다 나무의 굵은 생이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와 그의 옆자리가 되곤 했다 도장 속 이름들은 전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손끝에 만져지는 서체는 이름을 뚫고 들어가 뼈가 된 것만 같은데 명부만 남기고 그들은 떠나고 없다 아직도 그는 이름 바깥으로 나무 그림자를 새겨 넣는다 도장을 가만히 쓸어보면 누군가 풍경 속을 서성이다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면식도 없는데 웅성거리는 호명과 오래된 시간들이 손 안에 있다 막도장을 끝까지 손도장이라 부르는 이유, 이젠 알겠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조등 - 김가령..

한줄 詩 2021.08.26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숲을 지나갈 때 운구차에 실린 어매는 말을 쏟아냈니더 입말은 가슴에서 일어나 밖으로 쏟아져도 밖의 소리는 외계가 아니었니더 감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오랜 세월 참았던 속을 한꺼번에 탁 터트리는데 어매 참 감나무 밑에는 말 껍데기가 수북했니더 그늘이 들마루를 덮을 즈음 어매는 청보리 들판을 눈에 넣고 있었니더 보리싹이 치근에 달라붙어 정신 어딘가에 쌓였던 이바구를 생마늘 엮듯 말을 엮어나갔니더 어매 이제 말 좀 그만하그라, 야야 니 인생 뭐 있는 줄 아나 내가 겉보리로 살아왔다 아이가, 구순 어매의 입에는 바람이 다 빠져버렸니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찾겠다며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지는 울 어매 그 속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를 건져 올리는데 말이 첫 울음을 시작하는 순간 ..

한줄 詩 2021.08.26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 차영섭 이거 하나 알았더니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줄이야! 내가 친구에게 어떤 제의를 했을 때 받아들일 경우와 안 받아들일 경우의 수는 반 반이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좋아할 경우와 기분 나빠할 경우의 수도 반 반이네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안 받아들이면 기분 상하고 고통을 겪는데, 이것은 나와 남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남이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나 태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이 하나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네. 달을 보듯이 사람을 - 차영섭 사람을 항상 보름달처럼 바라본다면 말하지 않겠어요 달을 볼 때에는 초승달이라도 작지만 밝은 부분을 보고, 크고 어두운 부분은 아니 보지요 그런데 사람을 볼 때에는 크고 밝은 부분이 있는..

열줄 哀 2021.08.23

볼록 거울 속의 비둘기 - 주창윤

볼록 거울 속의 비둘기 - 주창윤 상징이란너무 자주 닦으면 녹스는 것이 아닌가 시청 광장과 덕수궁 사이를 마을버스처럼, 오가는 한 떼의 비둘기들 뜬금없는 비상 덕수궁 내 볼록 거울 앞에 섰을 때 빈 병 같은 나 터무니없이 부풀어 오른 똥배와 바람 빠진 뇌 볼록 거울 앞의 나와 비둘기의 공전(空轉)에는 차이가 없다. 자주 닦아 텅 빈 상징 속에서 한 번도 투쟁적으로 날아본 적이 없는 비둘기 떼가 광장 위를 선회한다. 위엄 있게, 아주 평화롭게, 코미디처럼.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성지순례 - 주창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고 이슬람교인들은 메카로 향하는 길목에서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마귀를 쫓고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서 환생의 하늘 물고기를 잡는다. 기독교 대..

한줄 詩 2021.08.23

부패한다는 것 - 박순호

부패한다는 것 - 박순호 간혹 공기에는 억울한 정령이 섞여들어 칼과 함께 흘러 다닐 때가 있다 촉수가 달린 칼은 누군가의 죽음이 전달되는 순간 급류에 휘말리는 배처럼 빠르게 다가와 집도한다 죽음이 다른 죽음을 보지 못하도록 죽음으로부터 죽음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눈알부터 노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게 진행된다 먼지 한 톨 일으키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오직, 하나의 정신과 집중력으로 그림자까지 한 칸씩 발골(拔骨)한다 풀숲에 개 한 마리 엎드려 있다 미동조차 없는 개 옆으로 풀줄기가 흔들리고 금파리 떼가 윙윙거린다 결국 생의 무게는 엎드린 채 살과 장기와 가죽 순서대로 순번을 어기지 않고 차례로 풀어지면서 바닥이 된다 부패는 한쪽으로 치우친 무게를 덜어낸다 죽음 이후의 대답은 소스라칠 만큼 간단명료하다..

한줄 詩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