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마루안 2021. 8. 26. 21:53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숲을 지나갈 때 운구차에 실린 어매는 말을 쏟아냈니더
입말은 가슴에서 일어나 밖으로 쏟아져도
밖의 소리는 외계가 아니었니더


감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오랜 세월 참았던 속을 한꺼번에 탁 터트리는데
어매 참
감나무 밑에는 말 껍데기가 수북했니더


그늘이 들마루를 덮을 즈음
어매는 청보리 들판을 눈에 넣고 있었니더
보리싹이 치근에 달라붙어
정신 어딘가에 쌓였던 이바구를
생마늘 엮듯 말을 엮어나갔니더
어매 이제 말 좀 그만하그라, 야야 니 인생 뭐 있는 줄 아나
내가 겉보리로 살아왔다 아이가, 구순 어매의 입에는
바람이 다 빠져버렸니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찾겠다며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지는 울 어매
그 속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를 건져 올리는데


말이 첫 울음을 시작하는 순간
어매는 운구차에 실려 먼 북쪽으로 달리고 그 좋아하던
핸드폰도 어매 손만 찾았니더


하도 우는 소리에 창문을 봤더니
거기에 메꽃이 낑겨 있었고
몸이 틀어져도 울 어매 보고 싶다는 말만 자꾸 했니더


*시집/ 모르는 영역/ 현대시학사

 

 

 

 

 

 

모르는 영역 - 권영옥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우리 보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당신에게 왔다는 것이, 달의 비늘이었다는 것이
서로의 뺨을 비비는 일이죠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그윽한 눈동자를 가슴에만 넣고
이제 천 년 동안 잊고 살아가야 하는데
12월의 갈매기의 눈빛도 젖어 있어요
당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찰나
바람이 섬의 끝자락으로 데려가네요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어요
바글바글
우리 수신호 해요 나는 기억의 향기로 날았다가
식은 향기로 말하다가 웃다가 찡그리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엄마 안녕!
같이 있고자 기적을 일으키려니 달이 보고 웃네요

 

 

 

 


# 권영옥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3년 <시경>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계란에 그린 삽화>, <청빛 환상>, <모르는 영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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