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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삶 -박민혁

말씀과 삶 -박민혁 요구하지 않은 기도는 하지 말아줄래요. 나의 믿음은 도식적이어서요. 많은 이웃을 사랑했어요. 양쪽 뺨 정도는 마음껏 내줄 수 있지요. 성애도 사랑이니까요.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요? 예쁜 슬픔 한 조각이 갖고 싶을 뿐이에요. 일생을 학예회처럼 살고 싶지는 않네요. 어린이를 연기하는 어린이는 끔찍하죠. 칠 흙 같은 밤에는 차라리 하늘을 보고 걷듯, 내 기도는 지속되지만 아멘을 발음할 땐 신중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절망은 내 탓이 아니죠. 비극은 생의 못된 버릇 같은 거니까. 강대상 뒤에는 당신 몸에 꼭 맞는 침대 걸려 있는데 아버지, 외박이 잦네요. 남을 미워하는 건 이젠 관두기로 했어요. 내 온실 속에는 꽃 피우는 고통만 들이기로. 통증 없는 삶은 결코 범사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플..

한줄 詩 2021.09.08

삼대 - 이문재

삼대 - 이문재 -미래를 미래에게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탔다 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가 많이 나는 먼 사막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다 만들어서 썼지만 아들인 나는 다 사다 쓴다 내 아들은 내가 번 돈으로 다 사서 쓰다 말고 다 갖다 버린다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다 만들어서 써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다 모래언덕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에서 석유를 파내는 것과 황해 바다를 메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덕분에 사막의 아들딸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아들딸도 차를 몰지만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모는 아들딸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모든 아버지가 아들딸의 미래를 끊임없..

한줄 詩 2021.09.07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늘어진 오후가 팽팽히 힘을 모은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오르가즘인지 오르가슴인지. 그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앞뒤로 몇 줄 문장을 만들어 끌고 가면 시가 될 것 같다. 오르가즘에 비유로 꽁꽁 묶어 앞으로 끌어 봐도 여름에 메타포를 걸어 뒤로 당겨 봐도 꼼짝하지 않는다. 따끔! 손보다 몸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티끌만한 개미가 발목을 물었다. 날 제 먹이로 생각하고 끌고 갈 모양이다. 무모함도 모르는 티끌 같은 녀석. 어! 개미 녀석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끌고 간다. 옆에 있는 친구와 깔깔거리며 제 굴로 끌고 간다. 까맣게 탄 티끌만 한 녀석 여름의 절정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저리 힘이 세졌을까. 친구..

한줄 詩 2021.09.07

가을나비 - 박인식

가을나비 - 박인식 깊고 푸른 투명 너울대는 한 날개 한 날개마다 하늘 마디 꺾였다 휘고 흰 마디 다시 꺾이면 푸르고 깊은 슬픔이 아름다움을 가두네 아름다움도 저리 지독해지면 지독한 사랑처럼 수인(囚人)이 되고 마는가 매혹에 갇혀 입술 떨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열지 못하는 낮달 못 본 척 가을나비 한 마리 하늘 마디 접었다 폈다 폈다 접었다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늘그막 늘그막이라는 말의 운율에서 그늘을 읽는 저녁 어슴프레 구겨지고 주름지는 언어물리학의 잔상들은 어떤 체념의 늘그막인가 동녘에 눈부시던 수사학 서녘으로 기운 지 오래 내 말의 움막에 그늘지는 이 초라한 문장은 얼마나 뜨겁던 격정의 늘그막인가 # 작가 박인식은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나무에게 ..

한줄 詩 2021.09.07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안심이 되었다 내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자꾸 미움에 가닿았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귀 같은 것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지문이 하나씩 사라져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방황이 습관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불쑥, 이라는 말은 어찌나 황홀한지 고흐가 제 귀를 잘라 버렸을 때 그걸 종이에 둘둘 말아 여자에게 건넸을 때 그리고 붕대를 감싼 자화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때 더 이상 슬픔은 자라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며 돌아서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잠가야 하는 것들과 잠기지 않은 것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지나가는 행인 - 이기영 그때 이상한 오후를 지나가는 중이었어 깎아지..

한줄 詩 2021.09.06

햇빛 한 줌 - 이산하

햇빛 한 줌 - 이산하 그는 사형수로 3년 6개월을 살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사형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고 무기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좁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날 그는 무심코 자기 무릎 위의 햇빛을 보았다. 북서향의 독방에 두 시간쯤 가만히 머물다 떠났다. 날마다 눈꺼풀 같은 창문으로 스며든 시한부 햇빛 그 햇빛이 무릎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을 때가 마치 어린 딸이라도 보듯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이 햇빛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햇빛은 또 찾아와 가만히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수시로 찾아온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날마다 무릎 위에 ..

한줄 詩 2021.09.06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빛나는 책 - 박현수 -스마트 폰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 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 거룩한 이론에서부터 가벼운 하소연까지 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 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 사고전서의 서적을 다 넣어도 오히려 자리가 남는 얇은 책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당신..

한줄 詩 2021.09.03

오래도록 - 이기록

오래도록 - 이기록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줏빛 유령 안에 들어가 밤새 온몸을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드라이플라워 - 이기록 아직 내가 젖지 않아서 너를 두고 있구나 가만히 두었는데도 너는 벌써 아무것도 남지 않은 구석에 들어와 있구나 휴일이 되어 술을 마셨고 검은 노래가 왔다가 사라졌는데도 너만은 유령처럼 옆에 서 있구나 그렇게 있구나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구나 이방인의 입술에 침을 바른다 ..

한줄 詩 2021.09.03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러시아의 목각 인형처럼 푸른 색조의 미소로 댐 같은 자비를 찾아 떠났다 보헤미안 언덕에 풍성하게 늘어뜨린 원피스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걷자고 해서 스스럼없이 걸었다 삶이 시작되는 허벅지 햇살이 내리쬐는 입술 양털 구름 아래 녹색 지대는 순항 중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마지못해 온 파티에서 우울한 한숨을 쉴 때 여인은 천국을 가자 했다 보헤미안 언덕에서 루마니아 여인은 머리를 풀고 야생화를 어지럽혔다 대지는 슬픔을 굴리며 갔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독거노인 - 김익진 오래된 한옥의 한낮이었다 방문을 몇 번 두드려도 정적뿐이다 그녀는 누워있었다 손은 번역할 수 없는 말처럼 떨리고 안부를 묻자 눈가엔 눈물이 고여있었..

한줄 詩 2021.09.02

노을 강 - 육근상

노을 강 - 육근상 눈물은 강물 같아서 슬픔이 울컥 나를 데리고 강으로 간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피 말리게 했는지 미쳐버리게 했는지 흩날리던 꽃잎도 강가에 와서는 또 한 번 뒤척이다 강물 소리로 돌아간다 덩어리째 떨어진 울음도 한쪽 다리 절며 서쪽으로 가고 텅 빈 방에서 노을 강 바라보는데 타다 남은 낮달이 흘러내린 이마가 벌렁거리는 심장이 다하지 못한 말처럼 훌쩍훌쩍 흘러간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새 떼 - 육근상 새 떼 날아오르자 먹감나무 이파리가 꼬리 흔들며 내려 앉았다 마당 켠 가마솥 아궁이로 몰려든 먹감나무 이파리에 눈알 하나하나 붙여주었다 개중 몇몇은 억새 바람에 홀려 호수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봄날 끝자락에 피어 당숙한테 머리끄덩이 잡힌 엄니는 말 한마디..

한줄 詩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