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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가야 여행 - 황윤

어쩌다 이 사람 책을 여러 권 읽게 된다.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인데 나 혼자 백제 여행을 읽으면서 팬이 되었다. 경주 여행에 이어 세 번째로 이 나왔다. 제목을 기막히게 잘 지었고 내용 또한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몰입이 된다. 책의 저자 황윤은 박물관 마니아다. 혼자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 감상하고 공부하는 것이 휴식이자 큰 즐거움이란다. 누구 하나가 인스타그램에 맛집이나 괜찮은 여행지라고 소개하면 우르르 벌떼처럼 몰려가는 것이 최근 경향이다. 맛집이든 여행지든 흔히 핫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무리 SNS 시대라지만 다양성이 사라지고 양극화는 심해진다. 빈부의 양극화도 문제지만 문화의 양극화도 심하면 문제가 생긴다. 저자 황윤의 책이 빛나는 것도 몰려다니는 여행이 아닌 혼자 가는 조용한 ..

네줄 冊 2021.08.10

밑장 - 권상진

밑장 - 권상진 기회는 언제나 뒤집어진 채로 온다 공평이란 바로 이런 것 이 판에 들면 잘 섞어진 기회를 정확한 순서에 받을 수 있겠지 그래, 사는 일이란 쪼는 맛 딜러는 펼쳐놓은 이력서를 쓰윽 훑어보고 몇 장의 질문들을 능숙하게 돌린다 손에 쥔 패와 돌아오는 패는 일치되지 않는 무늬와 숫자로 모여들던 가족들의 저녁 표정 같았지만 여기서 덮을 수는 없는 일 비밀스레 돌아오는 마지막 패에는 섞이듯 섞이지 않는 카드가 있었고 꾼들은 그걸 밑장이라 불렀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밑장을 빼내 옆자리에 쓸쩍 밀어줄 때, 딜러의 음흉한 표정이 밑장의 뒷면에 슬쩍 비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도록 판은 계속된다 어제 함께 국밥을 말아먹고 헤어졌던 이들이 더러는 있고 한둘은 보이지 않는 새 판에서 겨우내 패를 덮고 있던 나무..

한줄 詩 2021.08.10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고백처럼 날 것의 유목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찬을 기다리며 고개 숙이고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새기지 않은 문신만 탁자 위에 남았답니다 두 발로 선 적 없는 매일매일 기억하는 일에 그만큼의 잔이 필요한 것은 꼬리를 잃어버린 어제 때문입니다 코가 간질간질한 밤엔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수 있을까요 철거된 그림자가 웅크린 채 깨어나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조한 이름들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눈을 들기 시작하지요 뻗어가는 시간을 주워들면 사라진 말은 습하지만 마른 것은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을 깨물면 부두교의 주문처럼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는 피가 납니다 마른 가슴만 차오르는 날들입니다 감당..

한줄 詩 2021.08.10

시소 - 권수진

시소 - 권수진 내가 바닥을 치는 순간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가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것처럼 늘 서로의 균형점을 맞추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수평적 사이가 아니란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 서로 얼굴 마주 보며 대면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지 농담을 주고받는 거리는 아니었어 때론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어 사람과 사람 사이 살면서 엎치락뒤치락해도 이렇게 엇갈린 경우는 없었으니까 해맑게 뛰어놀던 아이들 하나둘씩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놀이터에서 너와 단둘이 남던 어느 날 어색한 기운이 주변을 맴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 같았어 해 질 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한..

한줄 詩 2021.08.09

유산 - 조기조

유산 - 조기조 그는 오랫동안 나사를 박았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단단한 결속을 꿈꾸는 나사를 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힘껏 박고 돌리고 조여도 어느새 슬그머니 풀려버리던 나사 나사를 박다 풀려버린 그의 몸에도 나사 몇 개를 박아 넣었다 목뼈 한 토막을 잘라내고 세 마디를 한 토막으로 고정시켰다 그 나사들이 풀릴 때 그의 몸이 한줌 재로 바뀔 때 누군가 옆에 있게 된다면 이런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나사를 몇 개를 남기고 갔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 조기조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곤란에 부딪힐 때 당신은 기술자를 찾는다 컴퓨터가 고장일 때 보일러가 자동차가 멈췄을 때 당신은 기술자를 부른다 기술..

한줄 詩 2021.08.08

자유로운 영혼으로 혼자서 걸었습니다 - 김인식

예전에 인도 여행 열풍이 분 적이 있다. 그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훌쩍 인도로 건너가 반 년쯤 머물다 온 지인이 있었다. 그때 나도 곧 다녀와야지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영영 못 가고 말았다. 먼 여행지일수록 떠남을 일단 저지르고 봐야한다. 많은 인생사가 그렇지만 여행도 갈 이유보다 못 가는 핑계가 더 많이 생기는 법이다. 내게는 인도도, 티벳도, 몽골도 늘 생각만 했지 떠나지 못한 여행지였다. 내 인생은 한 달쯤 온전히 여행자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만큼 각박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그랬다. 늘 떠나고 싶었던 여행지이면서 실행하지 못했던 곳, 못가는 아쉬움을 달래느라 여러 여행서를 읽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 책은 김인식 선생이 70살이 된..

네줄 冊 2021.08.06

21세기 벽암록(碧巖錄) - 최준

21세기 벽암록(碧巖錄) - 최준 자신(自信)을 못 믿는데 어디서 자신(自身)을 찾겠나 청사(廳舍)와 의사당(議事堂)의 부조리나 채굴하려다 속아온 길 구만리(九萬里) 날마다 수염을 깎고 베고 잤던 무릎에다 대못을 치네 저를 잃어버리고도 저리 말짱한 물그림자에게 만이라도 제대로 보이고 싶어서 천년 바람의 가야금 줄도 실은 몹쓸 인종사(人種史)처럼 소용없는 것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고백하라면 한나절은 말할 수 있지 그게 설혹 구만리 허황일지라도 변명이란, 나를 속여 온 나의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칠 얘기 아직은 멀쩡한 두 주먹으로 머리 쥐어박으며 걸어가다 옛 스승들처럼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해도 세간에서의 울화를 어찌 우화(寓話)였다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 나를 지나오고 있던 나를 눈 뜨면 솟아 있는 백척간두..

한줄 詩 2021.08.06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 주창윤

안드로메다로가는 배민 라이더 - 주창윤 머나먼 길이다 청량리역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별의 여왕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마법의 라면을 배달하러 페가수스 별자리를 향해 일만 광년의 속도로 질주한다.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외계인 폭주족들, 향하는 곳이 암흑성운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들어간다 큰 코끼리 별과 반딧불 별 사이 스타벅스 커피숍을 지나면 낙태된 자매 별들이 무중력 상태로 떠다닌다. 소행성 벨트를 따라 흘러나오는 미세먼지와 서울에서 뿜어낸 가스가 모여 잉태한 신성(新星)들 사이에 있는 분식집 은하정에서 라면 한 개와 이천 원짜리 김밥 한 줄로 나는 성급히 먹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 계단 아래서 마구 떨어지는 운석들이 우주 아래에 하얗게 쌓인다 기계인간 테레사가 "내 별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별도 마..

한줄 詩 2021.08.03

발이 시린 계절 - 백애송

발이 시린 계절 - 백애송 말을 거는 명함 앞에 선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게시판 앞에 우두커니, 지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고 어젯밤 지나친 나무의 손을 잡는다 흘러가지 않는 구름 아래를 서성인다 음소거 된 TV 앞 엿보는 그들의 세상은 은밀하고 패륜인지 불륜인지 알 수 없는 거리두기에는 슬픔이 빠져 있다 나의 이름인지도 모를 글자 앞에서 덧셈과 뺄셈을 한다 농담과 진담의 수위에 대해 아무에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거는 사람들 발이 시린 계절은 누구에게나 왔지만 누구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불혹의 문장 - 백애송 손톱으로 저며지지 않는 노란 결을 따라 칼날을 꽂는다 점점 커지는 시간으로부터 멀어진 너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결을 세우고 있다 세상 한 ..

한줄 詩 2021.08.03

불가항력 - 고태관

불가항력 - 고태관 깔깔깔 웃다가 잊을 거짓말 허튼소리를 궁리하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 거짓말에 실패한 만우절 나머지 364일 동안 진심을 그르친다 1월1일 카운트다운이 지나고 드는 생각 사람다운 것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라면 말라 버린 출생신고 잉크가 희미해지고 있다면 그게 늙는 거라면 서글프겠다 어른이 되다니 어른이 되고 나서 그다음은 뭐가 되지 다음 단계의 변신이 남지 않은 로봇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 쓸쓸하겠다 새로 핀 벚꽃보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 많았다 활짝 핀 꽃다발을 안고 해변을 달렸지만 막상 파도를 보면 심드렁하고 늘 떠나고 없는 사람이 보고 싶다 나는 모래성으로 허물어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겠다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걷는사람 보문 - 고태관 -죽어서도 나는 갈 데가 없어요..

한줄 詩 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