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빙과 결속 - 서윤후

마루안 2021. 8. 26. 22:05

 

 

신빙과 결속 - 서윤후


싸움이 끝난 뒤 깨진 화병은 누가 치우나

남겨진 사람은 조심성 없이 쓸어 담고
집 잃은 새를 보듬듯 꽃을 주워다
종량제 봉투 앞에 서게 될 때
그렇게 향기가 스민 어둠은 왜 밤새 사라지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생각하면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눈감으면 비로소 눈뜨는
화병에 베인 손날의 붉은 눈

유월의 신호위반 딱지가 팔월에 날아온다
빙빙 돌려서 하게 되는 말은
멈춰야만 알 수 있는 팽이의 표정 같아
어둠이 붙잡아둔 빛과의 일화

바깥은 어떻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
잠시 멈춰 서면 보이는 것이 있고
휘몰아쳐서 뒤섞인 모든 풍경이 검정으로 갈 때
나는 섞이지 못한 색깔처럼 분명해지고

나를 바라보는 종려나무 한 그루가
물 한 번 준 적 없는 내게
눈동자 위로 흐려진 것을 공짜로 털어준다

어둠은 어둠에게만 친절한 법이지
형편없는 예의를 갖추고서
창문을 거울 보듯 한다
까마득하다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안마의 기초 - 서윤후


해보세요, 맨발로 골프공 하나 지그시 밟는 일을
건강에 좋을 수도 있는 일을

꾹꾹 몸을 누르기에 좋은 것들을 봐요
어디가 아플 때마다 하나씩 사온 것들
뾰족한 것으로 자신을 찔러보는 용기는
이게 최선일 리 없다는 마음과는 사뭇 다르게

아파야만 아픔이 풀릴 수 있대요
뭉친 근육과 자신도 모르게 한 결심이
하나의 심박동을 나눠 쓰며 싸우는 것을 이젠 허락했어요

어깨가 먼저 죽어가고 기후에 어두어져요
매일 서늘하기도, 종종 젖기도 하는
나무를 흔들어야만 어제 날씨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돼요
마르지 않고 살아 있어서 종종
발을 주무르며 걸어온 나날을 복원합니다

모든 게 나아졌다고 믿어요
그런 수모를 겪는 밤이예요
초인종으로 해두기 좋은 울음소릴 채집하려고
성난 피로의 목줄을 놓아줍니다
놀란 새들이 어깨 위로 후드득 떨어지면

꾹꾹 눌러요 이게 처음도 아닌데
요령을 몰라서 졸다가 놓친 양들이 돌아와 밤새 울고요

그건 내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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