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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우리가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외지고 혹독해진다면 저 높이는 흉측한 돌일 뿐이지 거기서 우리 중 한 사람이 몹시 울어야 한다면 천 길 깊이는 나쁜 신념일 뿐이지 제발 희생을 실천해주세요 아찔함을 뛰어내려주세요 불처럼 단단한 눈물이 되어볼 걸 해뜨기 전에 길을 나선 내상(內傷)이 피운 우리는 문득 몰매처럼 서러운 불안의 아들딸 그러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번 생의 경사는 낡은 슬리퍼처럼 헐떡이지 우리를 보다가 우리만 보다가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잠깐의 미망이 닿지 않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꽃, 꽃을 지켜보는 난폭 여긴 뜨겁고 좁은 맹지가 될까 우리 몰래 갈라 터진 몸을 실천해주세요 헛꽃의 걸음이 더딘들 멈추지 말아 주세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우린 방자한 기백인 걸요 아슬하고 비범..

한줄 詩 2021.09.11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겸손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꽃이 있다 순결하다는 말이 그 곁에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배어 있는 꽃이 있다 그리하여 곱기도 곱구나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아미 숙인 수줍음이 뒤따라 나오는 꽃이 있다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떨림 같은 꽃이라니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을까 꼭 그만큼 숨은 듯 다소곳이 너는 피었구나 그윽하여라 첫눈처럼 내렸구나 꽃송이 눈꽃송이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소담하게도 너는 피어나서 달빛과 별의 향기 길어 올렸으리 서리서리 서리를 펼쳐 놓는 밤이나 날리는 눈보라 아랑곳하지 않다니 고요하여라 세상의 단아하고 고혹한 시어들을 노란 가을 햇살의 꽃술 속에 안고 품었구나 일찍이 어떤 꽃의 수사가 하마 이러할까 네 앞에 나를 기꺼이 내어놓는다 *시..

한줄 詩 2021.09.11

경춘선 - 서울 생활사 박물관 전시회

경춘선이 전철로 바뀌면서 예전의 낭만이 사라졌다. 기차가 현대화 되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추억도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은 늘 아쉬움을 남기는 법, 옛 추억을 돌아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초여름부터 시작되었으나 코로나가 안정되기를 바라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가게 되었다. 더 미루면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같은 서울인데도 노원구는 조금 멀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간다. 태릉역에서 가깝다. 경춘선은 내가 탄 열차 중 가장 많이 탄 노선이다. 주말이면 경춘선 열차는 늘 만원이었다. 맘모스 백화점이 있던 청량리역 광장 시계탑 주변에는 바리바리 맨 배낭족들로 가득했다. 돗자리 챙길 여유는 없었지만 기타와 녹음기 꼭 챙겼다. 화랑대와 퇴계원 들녘을 지나면 산과 강이 번갈아 보이는 풍경에 뛰어..

여덟 通 2021.09.11

밑줄을 왜 긋느냐고 묻는 아이야 - 안태현

밑줄을 왜 긋느냐고 묻는 아이야 - 안태현 내 가방엔 매일 빵과 달팽이와 알약과 술병이 넘친다 잘 닦인 거울처럼 비춰보고 싶은 것들이 넘칠 때가 있다 사랑니든 실핏줄이든 무엇보다 네가 왜 있느냐고 물었던 내 이마의 주름에 안개꽃이 지나갈 때 생각의 숲에 들어가 처음 보는 새의 가장 맑고 고운 목소리를 보란 듯이 찜해둔다 이만큼 왔으니 내 삶의 태반은 눈 둘 곳 없는 기다림이었으므로 어디 밑줄 하나 남아 있을까 자작나무 하얀 목덜미 같은 고백 한 구절 누구든 집어가라고 꺼내놓을 수 있을까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어딘지 모를 지금에 이르러 사랑을 잃어버리고 뒤돌아보는 법도 잊어버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밤이다 가끔 어둡게 걸었던 길이나 떠올리면서 생각을 ..

한줄 詩 2021.09.10

실면증 - 손병걸

실면증 - 손병걸 견디다 못해 늦은 밤 손전화기를 든다 숫자를 누른다 접속에 실패하는 깊은 밤마다 오히려 당신 쪽으로 나는 함께 걷던 적확한 주파수를 맞춘다 칠흑의 새벽이 여명에 이를 즈음 나는 고칠 수 없는 습관을 절망하며 창 너머 하늘 깊숙이 응시한 붉어진 눈길을 문 쪽으로 겨눈다 또다시 방문을 활짝 열고 허겁지겁 신발 끈을 묶듯 억제할 수 없는 발끝이 손끝처럼 불안불안 당신을 찾아 나선다 의연한 표정 속에 통증을 잘 감추고 정말 괜찮은 안녕이었다는 말 기꺼이 웃으며 돌아섰다는 말 그 말들은 다 거짓말 흘러간다는 시간이 되레 싸여 있듯 이별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몸의 거리일 뿐 그리움은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충분히 읊어도 잠을 잃어도 더 많이 아파해도 괜찮다 죽음조차 헤어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

한줄 詩 2021.09.10

일일 연속극 - 김해동

일일 연속극 - 김해동 일일 연속극을 보면서 견딘다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비디오테잎으로 장식장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분량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함께 울고 웃었다 때로는 기가 차서 억울해 하면서 "저것 다 연기야"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허위로 가득 찬 세상 재생하여 반복되어도 눈 뜨면 사라지는 안개 속이다 일일 연속극을 기다리면서 드라마 같은 또 하루를 견딘다 종방 어디쯤 덧니처럼 튀어나온 버들강아지 가늘고 긴 물관이 터져 내 봄도 언제쯤 활짝 피어나겠지 *시집/ 칼을 갈아 주는 남자/ 순수문학 패티 김 - 김해동 칠십오 세에 하이힐 신고 블루진 입고 포즈를 취한 디바 해는 뜰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고 황혼을 불러 노래한다 봄날부터 꽃 안개로 물들이며 연인들이 가야 할 길을 빛과 그림자로..

한줄 詩 2021.09.09

나를 미는 의문 - 서상만

나를 미는 의문 - 서상만 -작심 3 그래, 올 그믐을 넘기면 나 몇 살이지 오늘 이 노을 내일 저 바람 따라가며 무명에 잠들지 못하고 침침한 눈까지 가납하며 나잇살로 버티는 우련 내 속내가 뭣인가 무늬도 향기도 날아간 하구의 망부석처럼 망가지고 일그러진 고독 발동선 한 척 얻어 타고 나, 이제 분월포에 가서 흔들의자에 잠길까 보다 *시집/ 그런 날 있었으면/ 책만드는집 하늘은 - 서상만 사람들은 왜 하늘을 우러르고 원망하고 빌고 탄식하는지 시원의 나라, 그곳은 언젠가 우리들 돌아가야 할 곳 하느님은 해결사, 갠 날은 태양을 흐린 날은 눈물로 비 뿌리며 피눈물보다 더 맑고 냉정한 백설 생피 같은 먼동과 노을을 차려놓고 이 세상과 대면하고 있다 오늘 밤 나의 소원은 별에 지는 것 '나, 별무리 따라 빙빙 ..

한줄 詩 2021.09.09

음식물 쓰레기 전쟁 - 앤드루 스미스

TV에서든 유튜브에서든 먹는 방송은 인기다. 우연히 관련 자료를 찾다 들어간 유튜브 먹방 구독자 숫자가 100만명이 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식 정보나 상식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특정 메뉴를 조리해 먹는 것뿐인데도 그렇다. 대부분 먹는 것에는 관심이 많아도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는 등한시 한다. 이런 책은 요리책보다 안 팔릴 게 뻔하다.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스미스는 맛난 음식 잘 먹는 것에 초첨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음식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자다. 음식 쓰레기를 안 만들 수는 없다. 수박을 먹으면 껍질이 쓰레기로 나오고 생선을 먹고 나면 뼈와 머리 등이 모두 쓰레기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음식 쓰레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뿐 아니라 생각보다 참 많은 곳에서 음식이 버려..

네줄 冊 2021.09.08

흰머리 진행 경위서 - 이송우

흰머리 진행 경위서 - 이송우 한 놈을 뽑으면 여럿이 솟았다 엄마의 머릿속 새치는 솎아내도 늘기만 하였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좋아 더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도대체 그는 언제쯤 엄마 새치를 뽑아 줄 것인가 내 어린 무릎에 놓인 엄마 머리는 무거웠다 심통이 날 때면 나는 여럿을 잡아 뽑았다 아버지 없는 나, 엉터리로 뽑은 새치 때문에 백발이 된 울 엄마 사랑하는 박인순 선생님 그대여 내 새치를 뽑지 마시게 이것이 단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은 내 흰머리, 더딘 진행 경위서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실천문학사 수면 장애 - 이송우 비 그친 오후 청파동 길바닥 돌맹이처럼 굴러다니는 사람들 저 감은 눈과 벌린 입속에서 나는 잠을 잔다 키우던 개를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때려잡던 복날 어른들처럼 순해진 ..

한줄 詩 2021.09.08

흘러간 그 노래 - 차영호

흘러간 그 노래 - 차영호 너는 그리움 분무기 저무는 하늘에 이내를 갈아 곱게 뿌리고 저 멀리 산그늘 밑으로는 잔별가루를 솔솔 어린 내가 장고개 외딴집 사랑에 살 때 모기장 속에 뿜겨오던 촘촘한 저녁의 입자와 같이 푸른 땀내 날리며 소행성 틈새 비집고 카이퍼 벨트를 내닫고 있는 말발굽들 그리움은 먼저 길 떠난 별들의 갈기 고요한 베어링 속에 살면서 베어링보다 바삐 나부대는 쇠구슬 늘 내 입안을 맴돌면서도 나랑 공범이기를 부정하며 흘러만 가는 그대여 그 곡조 웅얼거리기는 가없는 우주에 좌르륵좌르륵 무궁동(無窮動)의 쇠구슬 쏟기 *시집/ 목성에서 말타기/ 도서출판 움 착화탄(着火炭) - 차영호 나는 밑천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잘 판을 벌리곤 하지 사랑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지 않고 덥석 미끼를 물고 ..

한줄 詩 202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