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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8월호에서 발견한 시

올 여름은 빨리 시원해져서 좋다. 유독 무더위가 일찍 찾아와 이 긴 여름을 어찌 견디나 했는데 다행히 며칠 새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이 더위에 마스크 쓰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요즘은 한결 나아졌다. 현대시 8월호에 눈에 띄는 시가 보인다. 최백규 시 두 편이다. 가수 최백호는 알아도 최백규 시인은 처음이다. 시를 읽고 정보를 찾아 보니 꽤 젊은 시인이다. 최백규는 1992년 대구 출생으로 2014년에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동인 시집을 내긴 했으나 아직 개인 시집은 없는 모양이다. 화가가 한두 작품 출품한 그룹전만 열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개인전을 가진 적 없는 것과 같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첫 시집이 조금 늦어진들 어떠리. 창..

여덟 通 2021.08.17

뜨거운 발 - 김지헌

뜨거운 발 - 김지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붉은 홍시 같은 달이 야트막한 언덕을 비추며 조금만 더 가보라고 한다 전력질주하는 손흥민을 보며 발이 축구공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인간이 갖고 있는 206개의 뼈 간절한 기도와 이야기가 새겨진 신전의 기둥 지금 서 있는 곳이 그의 일생의 결론이다 가장 처절하게 달려 도달한 그곳 무수한 발이 뒤따르고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고 종착에 도달할 때까지 때로는 접질려 절뚝거릴 때도, 연골이 닳아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에 찬 뼈들을 오래오래 달래가며 한밤의 환호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80여 년을 달려온 어머니의 발도 우리 집안의 전력질주였다 *시집/ 심장을 가졌다/ 현대시학사 어미 - 김지헌 생..

한줄 詩 2021.08.17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 - 김응교

백석과 윤동주의 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게 한 책이다. 시인 김응교는 일본 문학에 정통하기도 하지만 시인 윤동주와 김수영 연구가이기도 하다. 시집도 냈지만 시인보다 학자가 더 어울리고 업적도 평론에서 빛난다. 대책 없는 이 활자 중독자는 시인에 관한 글은 놓치지 않고 읽으려 한다. 유독 백석과 김수영에 관한 글은 더 그렇다. 소설 잘 안 읽는 편이지만 김연수 소설 은 백석의 일생을 그린 이야기여서 열심히 읽었다. 백석, 윤동주, 김수영, 서정주를 한국 4대 시인으로 생각한다. 학자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시를 읽으면서 내 스스로 정한 것이다. 아쉽게도 서정주는 작품보다 살아온 정체성이 나와 맞지 않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교과서에서는 윤동주와 서정주를 배웠으나 나중 시를 알아 가면서 백석이..

네줄 冊 2021.08.16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 박주하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 박주하 ​ 오늘은 또 어떤 마음으로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는 장미의 심장을 찢는 법부터 배웠구나 어제의 얼룩을 지우지도 못했는데 오늘 주고받은 수치심들이 어둠에 물들어 갑니다 우리가 배운 가혹한 말들은 심장에서 나왔으나 돌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돌아가도 붉은 꽃을 피울 여유는 없겠지만 하나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죄는 상한 여름밤을 지나갑니다 거리는 이미 낡아 버렸고 도처에 자신을 끌고 가는 발소리들이 낯설어지는 이곳 한없는 마음의 겹이 타올랐던 것인데 왜 우리는 늘 서로 다른 말을 듣는 걸까요 당신의 날들은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갔지만 기억은 처음으로 돌아와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앞으로 열 걸음, 뒤로 열 걸음 매일 십자가가 열리는 여름밤 오직 십자가만 ..

한줄 詩 2021.08.16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고마운 분들 고마워서 미안한 분들 생각할수록 고약해지는 놈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부르지 않았는데 다들 와서 왁자지껄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잘못한 게 없다며 치고받기도 했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우리의 혼자 - 이문재 혼자는 바쁩니다 외롭거나 쓸쓸할 겨를이 없습니다 혼자는 오늘도 모든 걸 혼자서 다 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전기밥솥 예약 버튼을 눌러놓지 않는 것도 옛 애인 이름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

한줄 詩 2021.08.16

미국을 만든 50개 주 이야기 - 김동섭

미국행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툭 하면 엎어지곤 했던 안 풀린 인생에서 미국행은 도피처이자 새로운 인생을 펼칠 곳이라 생각했다. 예전에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국 교포가 그랬다. "미국은 본인 하기 나름이에요. 외국에서 꿈을 이루기엔 미국이란 나라가 최고에요." 그때는 공감이 안 갔는데 어쩌다 보니 오매불망 미국행을 바라게 된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미국 대사관 앞 긴 줄도 서 보았다. 어찌나 비자가 까다로운지 정식 이민은 불가능했다.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다. 정식으로 안 되니 불법 이민을 시도했다. 진짜 여러 군데 알아봤다. 착수금 조로 돈 조금 날리고는 결국 포기했다. 지금도 미국은 세계에서 이민자가 가장 많다. 난민이든 불법 이민자든 어떻게 해서든 미국을 가려고 한다. 어찌..

네줄 冊 2021.08.12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 전장석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 전장석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죽음은 골방에서 사흘 만에야 꺼내졌다 이웃집 할머니의 말이 적중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잠든 척하며 119차에 실리기 전까지 죽음은 가장 평온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 틀니를 물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설자가 얼굴을 쓰다듬자 식은 손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심할 여지없는 자연사라며 구급대원들은 시신을 재빨리 수거하였다 가족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목격자들이 유가족이 될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길 꼭대기 삶이었다니 이제 길을 내려가야 하지만 팽팽한 곳을 향해 그는 처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딱 한 번만! 하고 눈 뜨려다 내려가는 길을 보고 안심한 눈을 다시 감았다 *시집/ 서..

한줄 詩 2021.08.12

사소한 자유 - 이송우

사소한 자유 - 이송우 눈발 옆으로 날리는 비로봉에서 땀에 젖은 안경은 불투명 얼음 조각이 된다 동여맨 얼굴 틈을 기어이 뚫는 눈썹까지 허연 바람에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렵다 두터운 방한 장갑 속 손가락마저 얼리는 소백 칼바람 앞에 버프를 내리고 말할 용기가 없다 볼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이 사소한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가 말할 수 있다 아니, 다르게 말할 수 있다 공기처럼 가벼운 이 자유가 얼마나 컸던 것인가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실천문학사 옐로우 콤플렉스- 이송우 아니오, 나는 모릅니다 오빠 대신 여순 부역자로 총살당한 스무 살 여인의 노래, 구례 산수유를 산수유는 유채꽃을 닮았고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어제 내린 춘삼월 폭설에 만복대 하얀 턱수염을 보았습니다 봄꽃 만발한 서시천..

한줄 詩 2021.08.12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흘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

한줄 詩 2021.08.11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 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한줄 詩 202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