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부패한다는 것 - 박순호

마루안 2021. 8. 23. 22:02

 

 

부패한다는 것 - 박순호

 

 

간혹 공기에는 억울한 정령이 섞여들어 칼과 함께 흘러 다닐 때가 있다

촉수가 달린 칼은 누군가의 죽음이 전달되는 순간

급류에 휘말리는 배처럼

빠르게 다가와 집도한다

죽음이 다른 죽음을 보지 못하도록

죽음으로부터 죽음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눈알부터 노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게 진행된다

먼지 한 톨 일으키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오직,

하나의 정신과 집중력으로

그림자까지 한 칸씩 발골(拔骨)한다

 

풀숲에 개 한 마리 엎드려 있다

미동조차 없는 개 옆으로 풀줄기가 흔들리고

금파리 떼가 윙윙거린다

 

결국 생의 무게는 엎드린 채

살과 장기와 가죽 순서대로

순번을 어기지 않고 차례로

풀어지면서 바닥이 된다

 

부패는 한쪽으로 치우친 무게를 덜어낸다

죽음 이후의 대답은 소스라칠 만큼 간단명료하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오늘 마주한 것들 - 박순호                         


오늘 마주해야 하는 얼굴과 마주선 것들
우연히 발견되는 뒷모습 그럴 때,
모든 운동이 멈추고
마찰음이 가라앉을 때,
어느 곳에선가 거짓 고백이 싹튼다
죄다 발라먹고 가시만 남은 공허한 식탁
홍수에 떠밀려온 통나무처럼
몸에 맞지 않는 침묵을 걸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대해서 말을 아낀다

사라져버린 심장에게
한쪽으로 치우친 뇌에게
도무지 맡길 수 없는 손에게

절망이란 얼마나 과장될 수 있는지*

오늘 정해진 식단
오늘 전해 받은 우편물
오늘 생각난 약속

우리는 다가오지도 않는 일에 대해 미리 겁을 먹는다

도처에서 습득한 절망을 돌려줄 길이 없다
밤하늘에는 주울 수 없는 별이 넘쳐난다
하나만 가졌으면
단 하나만 가졌으면 하지만,
온몸은 그믐과 눈보라와 삭정이뿐이다

오늘밤도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불 꺼진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든다


*조영관 시, <동백꽃>에서 차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