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볼록 거울 속의 비둘기 - 주창윤

마루안 2021. 8. 23. 22:11

 

 

볼록 거울 속의 비둘기 - 주창윤

 

 

상징이란너무 자주 닦으면 녹스는 것이 아닌가

시청 광장과 덕수궁 사이를

마을버스처럼, 오가는 한 떼의 비둘기들

뜬금없는 비상

덕수궁 내

볼록 거울 앞에 섰을 때

빈 병 같은 나

터무니없이 부풀어 오른 똥배와

바람 빠진 뇌

볼록 거울 앞의 나와

비둘기의 공전(空轉)에는 차이가 없다.

자주 닦아 텅 빈 상징 속에서

한 번도 투쟁적으로 날아본 적이 없는

비둘기 떼가 광장 위를 선회한다.

위엄 있게, 아주 평화롭게,

코미디처럼.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성지순례 - 주창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고

이슬람교인들은 메카로 향하는 길목에서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마귀를 쫓고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서 환생의 하늘 물고기를 잡는다.

 

기독교 대학교수인 나는

주일 대학교회에 예배보러 가지 않고

사우나에 간다. 일상의 의레는 순례가 된다.

 

물세례의 찬송가를 부르고

열탕의 바닥에서 올라오는 물방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층으로 올라가

황토방에서 느끼는 흙의 촉감

성스러운 것은 말씀의 청각이 아니라 손끝의 촉각이라고 믿으면서

불가마 방에서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하셨던 하나님의 굵은 땀방울도 흘리면서

소금방으로 가서 죄를 씻어낸다.

 

맥반석 달걀 두 개와

식혜 한 잔을 마시면 나의 주일 성지순례는

아름답게 끝난다.

 

만 원의 순례

현금 칠천 원

부활 달걀 두 개 천 원

성수 식혜 한 통 이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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