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 황중하

마루안 2021. 8. 27. 19:26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 황중하

 

 

깜박이던 불빛이 사라지고

조금씩 나도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덧 나는

너무 많은 젊음을 소모해 버렸다

 

비닐에 포장된 채로 꽃잎이 시들어가고 있다

숨 한번 크게 쉬어보지 못한 채

꽃은 벌써 말라가고 있다

 

그렇게 이번 나의 생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태양 속을

내일은 다시 건널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아카시아 향기를 남긴 채 사라지고

나는 향기로운 죽음의 냄새를 음미한다

 

누구의 손도 잡지 않는다

상처가 두려우므로

상처가 두렵지 않으므로

죽어가고 있음을 매번 확인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 생을 퇴고하기 전

내가 할 일은 나를 애워싼 비닐 포장을 벗고

숨 한번 크게 쉬어보는 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시집/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 문학의전당

 

 

 

 

 

 

파국 - 황중하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밤.

코르크 마개를 열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독한 포도주 같은 밤이 흘러간다.

 

이 쓰디쓴 밤을 나 홀로 다 마실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깊고 좁은 밀실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숙성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코르크 마개는 분노로 폭발하고

나의 삶은 밤의 잔해로 가득하다.

지워지지 않는 밤의 얼룩들.

 

나는 나로부터 달아난다.

뿌리로부터 도주하려는 나무처럼

나는 나로부터 도주한다.

어두컴컴한 심연으로부터 솟아나는 죄의식.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로부터 말라 죽으려는 나무.

밤의 독주로 뼛속까지 말라 죽으려는 나무.

 

더 이상 이주를 꿈꾸지 않는다.

슬픔을 분출하지 않는다.

빈 잔은 깨어지면 그뿐.

코르크 마개를 기억하지 않는다.

 

 

 

 

# 황중하 시인은 1982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3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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