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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 이보람

흥미롭게 쭉쭉 읽어내려간 책이다. 한 10여 년 전부터이던가. 이런 류의 책을 좋아 한다.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하던 미니멀리즘을 실행하면서부터 유독 환경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된다. 매사에 주먹구구식이면서 책 읽기는 비교적 계획적이다. 축소주의자란 말이 명징한 단어이지만 막상 일상에서 써먹으려고 하면 막막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게 축소주의자구나 했다. 읽으면서 배우고 읽고 나서 실천하고 싶어지는 좋은 책이다. 작년 말인가. 올초였던가? 읽고 싶다는 생각에 메모를 해 눴으나 읽을 기회가 없었다. 꼼꼼하게 골라 목록에 올렸어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기회가 오지 않거나 영영 잊혀지는 책이 많았다. 무슨 내용의 책인 줄 알고나면 무턱대고 읽기에 앞서 저자가 궁금하다. 이보람, 이름만 보면 ..

네줄 冊 2021.08.22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 김지명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 김지명 모자랄 게 없어 눈 밖을 몰랐다 초원은 어디든 빈집이었지만 눈에 불을 켰다 끄고 마는 풋풋한 마을이었다 푸르름으로 인심을 얻고 잃었지만 서두르 않는 보행법은 슬픔이 놀다 갈 등걸을 마련하는 것 빈 옆구리로 쏟아져 내릴 추억을 앓고 있는 것 익숙한 밤낮이 잘 숙성되었지만 먹지 않을 풀은 건드리지 않는 약시의 코뿔소 아무도 이상 기온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초원에 이만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폭설은 처음 보는 먼지라서 괘념치 않았지만 차가움의 촉감이 풀 가시처럼 박혔다 한다 몸에 살지 않는 차가움으로 미쳐 날뛰었지만 이웃들 점호하듯 폭설이 짓밟고 갔다 한다 웅크린 이웃이 짧은 다리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야크처럼 털이 없어 추위를 내치지 못했다 한다 추위는 정지된 세..

한줄 詩 2021.08.22

장미 찾아오시는 길 - 이은심

장미 찾아오시는 길 - 이은심 재건축반대 현수막이 장마에 지워지는 쪽문 근처입니다 잔가지를 치려다 서로의 목을 칠까 가시를 안아주는 곳입니다 붉음의 머리맡을 넘어가면 누가 죽는다는데 방금이 작아지면서 철조망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다 해도 장미는 또 장미 잘 놀던 꽃망울이 무더기무더기 감염되면 아무도 심지 않은 눈꺼풀이 초대될 차례입니다 꺾어야 꽃인 걸 붉다고 다 마음이 아닌 걸 무얼까 넝쿨 다음 불어닥치는 이것은 첫 화장을 시작하는 눈시울은 피고 지고 뜨거웠고 일정대로 후줄근했고 자그마한 채소와 하얀 뿌리와 일요일 같은 꽃그늘을 버스 두 대가 나란히 달리는 이쪽과 저쪽 세상을 건드린 건 가시가 먼저였습니다 담장과 담장의 간격이 속은 것처럼 붉다고 말했던가요 욱신거리고 후끈거리느냐고 물었던가요 천박이 없어서 ..

한줄 詩 2021.08.22

마이클 잭슨을 아시나요

흔히 한 분야에 독보적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황제라는 호칭을 붙인다. 축구 황제 펠레,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등이다. 내 어릴 적 마이클 잭슨은 정말 황제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나는 별로 좋은 줄 모르겠는데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마이클 잭슨은 우상이었다. 워크맨이라는 휴대용 카세트에 테입이 늘어지도록 잭슨의 노래를 듣는 친구도 있었다. 천성이 빠른 곡을 좋아하지 않은 나도 당시의 잭슨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후였을 것이다. 어쩌다 잭슨에 관한 얘기가 나왔는데 젊은 직원이 그랬다. "마이클 잭슨이 흑인이었어요?" 내 조카 뻘 청년처럼 마이클 잭슨이 흑인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흑인, 백인 구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잭슨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가 벗어나..

열줄 哀 2021.08.22

야생의 분석 - 이자규

야생의 분석 - 이자규 못난 버드나무만 베어져 둑 아래 던져졌다 십 년 후에나 읽힐 시를 쓰는 밤 돛대도 없이 삿대도 없이 버들잎들은 물 위로 떠났다 밟히면 밟힐수록 피가 도는 근성 목이 없어서 얼굴 밟히는 꽃 민들레 길 밟은 그날부터 내 목에서는 모래가 섞여 나왔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탱탱한 쓸개를 따오는 야생의 그림자들도 있다 고성능 도시에서 기르던 늙은 고양이가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식장 옆에 예식장이 새로 들어섰고 두 건물을 방문하는 꽃의 색깔은 서로 달라 생이별과 행복 세트가 나란히 살고 있다 기를 쓰고 길을 내는 사람들의 대도시란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의 식욕 아닐까 남새밭을 헤적여 모종을 핥아먹고 사라졌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물구나무 - 이자규 두 팔목으로 바닥을..

한줄 詩 2021.08.19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쪽창에 대하여 - 이윤학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쪽창에 대하여 - 이윤학 내가 밖에 나갔을 때 그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는 감쪽같이 사라져주었다 그는 느낄 수 없는 존재의 시발점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무모한 스토킹이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 내달리다 커브를 꺾지 못해 그대로 샛강을 나는 나를 잠시라도 지켜보았을 터 그는 밤샘 뜬눈으로 나를 지켜보았을 터 정신을 차리고 돌무더기에 널브러진 나를 주체하지 못할 때 일으켜 세워준 것도 그였다 그의 손이 입술을 꿰뚫은 돌부리를 제거해준 것이었다 자전거 핸들을 똑바로 세워준 것이었다 일그러진 바퀴를 굴려 집으로 데려다준 것이었다 부러진 이빨이 끊어내지 못한 희디흰 신경이 누레질 때까지 숨을 불어넣고 빼낸 것도 그였다 석유버너 불을 쬔 ..

한줄 詩 2021.08.19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무성한 날이 있었다 강물을 따라서 노래가 흐르던 여울목을 건너던 나루터나 뗏목꾼이 쉬어 가던 주막집 어귀 느티나무는 꼭 돌아와야 할 언약처럼 서 있다 하늘의 별자리가 흐르듯 세월이 흐르고 다시 돌아올 시간을 헤아리듯 밤하늘을 바라보면 추억이 시작되는 어느 길목에 아직도 무성한 그리움처럼 느티나무가 서 있다 첫사랑이 또아리를 틀었던 곳 등불 같은 이야기가 서리서리 모여들어 바람처럼 몰려와 우수수하고 몸을 떨면 겨울밤처럼 춥고 외로웠던 곳 강 건너 세상을 꿈꾸며 이른 새벽 노 젓는 소리 강물을 깨울 때 느티나무는 홀로 운 적이 있다 강물이 스치고 가듯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소년들은 벌써 지천명이 되었다 *시집/ 다시 청풍에 간다면/ 천년의시작 다시 청풍에 ..

한줄 詩 2021.08.19

남매의 여름밤 - 윤단비

잔잔하면서 울림이 있는 영화를 봤다. 코로나 시대에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고 일부 업계는 쑥대밭이 되었다. 영화판도 코로나로 초토화가 된 분야다. 영화 개봉도 문제지만 영화 만드는 일도 많은 제약을 받는다. 코로나 이전에 찍은 작품이지만 이런 영화로 황폐해진 마음을 정화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저예산 영화이면서 이렇게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 만나기 쉽지 않다. 이혼하고 두 자녀를 키우는 남자가 있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아버지 집을 방문한다. 팔순의 아버지는 홀로 시골 집을 지키고 있다. 반지하 방에서 사는 아들에 비해 아버지 집은 2층 단독 주택이다. 할아버지와 만남이 어색했던 아이들은 넓은 집에 금방 적응을 한다. 그동안 아들은 아버지가 틈틈히 도와주었지만 그때마다 사업에 실패해 말아..

세줄 映 2021.08.18

여름성경학교 - 박민혁

여름성경학교 - 박민혁 부직포로 만든 예수의 가면을 쓰고, 어린이들을 보듬어 준다. 그중 한 아이가 내 귀에 속삭이길, 하나님인 척 마세요. 무얼 잘했는지도 몰고 일단은 참 잘했어요. 그래 사실, 모방할 것이 없으면 불안했던 것. 너와 나는 서로를 흉내 내는 거울에 불과했나? 결국 우리, 끝까지 이길 수 없는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것. 너는 언제까지 침묵하고만 있을 셈인지. 너라고 불러서 화가 난 거니? 짓궂은 불행이, 내가 쥔 성스러운 마리오네트의 끈을 툭툭 끊고, 달아나는 것을 본다. 십자가에 걸어 놓은 내 밀랍 인형을 떼 낸 뒤 나도 모르게 그만 두 손을 모으고, 신이여 다만..... 인간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조금 지쳤다. 아니 조금 삐쳤다.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출판 여름성경..

한줄 詩 2021.08.18

별이 빛나는 낮에 - 손음

별이 빛나는 낮에 - 손음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겠구나 말하면 희망이 화를 내겠지 이제 겨우 살 수 있겠구나 말하면 절망이 화를 내겠지 햇볕이 앙상하게 부는 날 검정 우산을 쓰고 나는 해변으로 갔지 대낮에도 반짝반짝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 대낮에도 불을 켠 기차가 미친 듯이 지나가는 곳이지 나는 매일 우산을 쓰고 해변으로 갔지 아무라도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비를 쓰고 구름을 쓰고 누명을 쓰고 파도가 최선을 다해 밀어 올린 해변의 것들 피붙이같이 엉켜 있네 나도 그 곁에 쪼그리고 살면 안 되나 슬픈 일은 혼자 앓아야 하는데도 모래와 파도와 죽은 갈매기에게 두근두근 내 얘기를 털어놓기에도 하루가 짧았지 내일도 해변으로 갔지 모레도 해변으로 갔지 영원히 갔지 나는 날마다 그곳에서 무엇이든 쓰고 썼지 누..

한줄 詩 2021.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