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장센 - 윤의섭

마루안 2021. 8. 27. 19:33

 

 

미장센 - 윤의섭


꿈속에선
공원 벤치에 앉은 아이의 뒷머리가 있었다
꿈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였는데
왜 거기 앉아있었을까

허름한 골목
폐타이어 화분에 핀 채송화를 슬쩍 스쳐가는 바람은
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단역배우처럼
서툰 벽화는 꼭 서툴러야 했고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에겐 기억나지도 않을 오후겠지만

그래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기적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종말들

악몽을 꿨는데 아이의 뒷머리가 또 놓여있었다
채송화는 시들어 죽었고
그 곁으로 바람은 여전히 불어야만 했다
산 너머에선 천둥치며 비구름이 몰려오고

나는 얼마나 잠깐 화창했던 생물이었던 걸까
비가 오기까지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음력 - 윤의섭

 

 

비가 내리면 소금의 유적은 지층을 옮겨다닌다 갯벌이 타고난 생리는 사라지는 것이어서 뒤늦게 찾아온 여행자는 염생의 환영을 찍는다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 중이라지요 신은 아직 쉬지 않나봅니다 하루 남았지요

기분이 좋아요 누구든 피할 곳이 없다는 평등은

비려요 바다 밖으로 나오면 비려지죠

 

달이 바람에 밀리고 있었다

소금에 절여져 썩지 않는 폐염전

포구에서 제방까지 흔적 없이 지워진 해안선

선 채로 말라죽어가는 갈대는 습지의 역법을 따른다

 

음력으로 살아요 생일도 제삿날도 모든 날을 음력으로 따지고 들면 다른 세상에 사는 거죠

달의 날 월곶이라는 이정표를 따라왔는데 귀환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활짝 핀 달의 음산한 중력에 끌리기라도 한 듯

 

이대로 남겨진다는 건 버려졌다는 말이다

파도는 더 이상 밀려오지 않고

원양으로부터의 연락도 끊기고

사라져간 섬보다 무섭게 외로워진다

기일은 늘 음력이었고

잊힌 사람은 영원히 산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이안소프의 슬픔 - 정경훈  (0) 2021.08.29
무릎의 인력 - 고태관  (0) 2021.08.27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 - 황중하  (0) 2021.08.27
신빙과 결속 - 서윤후  (0) 2021.08.26
손도장 - 김가령  (0) 2021.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