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도장 - 김가령

마루안 2021. 8. 26. 21:59

 

 

손도장 - 김가령

 

 

오래전부터 발소리가 띄엄띄엄 흘러왔다

 

한때 그도 기계식 앞에서 잠시 흔들렸다 수전(手顫)의 순간이 올 때까지 손을 고집했다

 

그를 끝까지 지켜본 건 가게 앞 은행나무였다

 

나무의 굵은 생이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와 그의 옆자리가 되곤 했다

 

도장 속 이름들은 전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손끝에 만져지는 서체는 이름을 뚫고 들어가 뼈가 된 것만 같은데

 

명부만 남기고 그들은 떠나고 없다

 

아직도 그는 이름 바깥으로 나무 그림자를 새겨 넣는다

 

도장을 가만히 쓸어보면 누군가 풍경 속을 서성이다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면식도 없는데 웅성거리는 호명과 오래된 시간들이 손 안에 있다

 

막도장을 끝까지 손도장이라 부르는 이유, 이젠 알겠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조등 - 김가령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겠다

헌책방에서 감미로운 페이지를 넘기던 나의 상상에도 조등이 걸렸으므로

자작나무 잎을 흔드는 바람을 따라
그만 무덤 속으로 침몰해야겠다

태양과 바람과 달과 별은 여전히 푸르고 여전히 치열하지만
이제 난 빛도 어둠도 아니니까

조의금을 계산하고 슬픔을 정산해야겠다
안에선 아무도 울지 않으니까

조등의 유효기간은 사흘이면 충분하고
배웅은 조등 하나면 족하니까

연고지 없는 세상 속으로 그만 가라앉아야겠다


 

 

 

*시인의 말


개살구나무를 흔들면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단지 살구가 먹고 싶었을 뿐인데
살구는 오지 않고

짓무른 나의 환상통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나는 영원히
개살구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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