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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중심 - 황원교 시집

이 시집은 손으로 쓴 시가 아니라 입으로 쓴 시를 묶은 책이다. 입으로 썼다니까 시낭송을 녹음한 낭송 시집처럼 들리는데 황원교는 사지마비 장애인이다. 그는 입에 나무 젓가락을 물듯 컴퓨터 마우스 스틱을 물고 한 자 한 자 시를 쓴다. 시인을 안 것은 몇 년 전 이라는 시집을 읽고서다. 장애인이 된 후로 한 번도 땅을 딛지 않은 신발을 가슴 시리게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절실하게 사는 이유가 있겠지만 시인은 시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시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시인이 살아온 인생 역정을 알아 보자. 1959년 춘천 출생인 시인은 강원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고 ROTC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던 1989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딱 서른 살이었다. 결혼을 1주일 앞두고 혼사 문..

네줄 冊 2020.04.14

가장 오래된 유적 - 이철수

가장 오래된 유적 - 이철수 지하도를 건너오다 앉은뱅이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초저녁, 짐승의 순한 눈을 닮은 사내 눈빛이 너무 시려 내 몸의 안쪽이 얼얼했다 어떻게 왔을까, 그 사내 끌고 온 따뜻한 길의 안부가 궁금했다 발도 길도 없는 속수무책이 죄인처럼 불려나와 허공에서 석고대죄 하는 입, 저렇듯 징글징글한 마려움의 피돌기가 반 토막의 육체로 물구나무서서 내 무심천을 건너오는데 속도로도, 관념으로도 통과할 수 없는 이 난감한 유적 앞에 서서, 나는 누란의 미이라같이 썩지 않은 어여쁜 가난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신성이 불민한 땅 위에 병처럼 번져 누대로 세습된 열렬한 종교 같은 것이어서 흰 사발같이 고요한 허기로 의연한 슬픔의 눈으로 엎드려 밥을 비는 것 저 육신을 업고 있는 큰 입은,..

한줄 詩 2020.04.12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 정덕재 시집

출판업에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간 동향 중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출판사가 바로 이다. 개성 시대라서인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출판사가 많다. 시집 전문 대형출판사 못지 않게 걷는사람이 좋은 시집을 많이 내고 있다. 호시탐탐 읽을 만한 시집 없나 엿보다 새로운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이 시집은 제목부터 강렬했다. 그럴 듯한 제목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이 많기에 제목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집은 제목으로도 내용물로도 독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 시집이 네 번째 책이지만 정덕재 시인은 별로 안 알려진 작가다. 나도 첫 번째 시집 빼고는 읽지 못했다. 이전의 시에서 크게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연속극 보다가 다음 편이 궁금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을 제대로 읽..

네줄 冊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