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낮달이 허락도 없이 - 이서화 시집

첫 시집이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두고 있던 시인이었다. 손꼽아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 나온 시집 목록에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일천한 내 지식으로 시 비평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 그냥 시가 참 마음에 와 닿았었다는 기억이다. 이런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이번에 어떤 시들이 실렸을려나. 좋아하는 감독의 새 영화를 보기 위해 불꺼진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설렘이라고 할까.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그래, 무명 독자가 낮달처럼 허락도 없이 불쑥 감상을 쓴다. 좋은 시를 가슴에 담고 그 시를 잊지 않기 위해 또박또박 한 자씩 옮겨 적는 마음 또한 나름 즐거움이다. 한글 막 익히기 시작한 아이가 길가의 간판을 한 자씩 읽는 희열, 그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아이의 눈동자처럼 시집에 오래 눈길이 갔다. 이..

네줄 冊 2020.05.03

나의 장례식 - 임준철

제목부터 마음을 확 휘어잡는다. 제목에 낚이든 내용에 낚이든 이 책은 서문만 읽어도 본전은 건질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인 임준철 선생은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한우물을 파고 있는 우직한 학자다. 대중과 많이 접촉하는 도올 선생 빼고는 한문학과 친숙하게 하는 저서가 많지 않은데 이 책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귀중한 저서다. 내가 죽음에 관한 책을 유난히 좋아한 탓도 있겠지만 참 흥미롭게 읽었다. 한문학자인 저자의 번역 실력도 이 책의 진가를 더 배가 시킨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외국어를 다루는 학자라도 우리 글 실력이 제대로 받쳐줄 때야 빛이 난다. 한문학도 우리 글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엄연히 중국 글이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한글은 천한 문자라 무시하고 중국 글을 열심히 배운 덕..

네줄 冊 2020.04.30

이장 - 정승오

제목만 보고는 동네 일을 보는 이장을 말하는 줄 알았다. 영화 제목은 무덤을 옮겨 다시 장례를 치르는 移葬을 말한다. 제목처럼 영화는 다섯 남매가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고향 땅에 묻혀 있는 아버지의 이장을 위해 다섯 남매가 고향 큰아버지 집으로 떠난다. 딸 넷에 막내 아들 하나, 다섯 남매의 부모는 아들을 낳기 위해 딸 넷을 줄줄이 낳고도 아들 하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당연 넷 딸은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큰아버지 또한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로 아들 없는 가족은 있으나 마나라고 여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다섯 남매는 만나면 으르렁거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티격태격한다. 게다가 생전의 부모님에게 금지옥엽이었던 아들은 소식도 없..

세줄 映 2020.04.30

액자, 동백꽃 - 이명우

액자, 동백꽃 - 이명우 액자에서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들린다 헛기침에서 피가 나오고 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부터 액자가 뒤틀어져 있다 중심을 잃어버린 배처럼 한쪽으로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하수도에서 강으로 바다로 흘러 텅 비어 갔다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던 아버지는 벽에다가 동백꽃 같은 점을 다닥다닥 찍어놓다가 어느 날 쿠웅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 틀어졌던 입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정지되어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떨린다 액자를 뚫고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애지 입술 - 이명우 꽃밭에서 날아가던 나비가 발등에 걸리는 늦은 오후 날개의 파문이 꽃잎에 어지럽게 내려앉는다 몽우리를 벗는 소리만 여리게 들리다가 잠긴다 갓 태어난 순간이었다가 가늘게 떨리는 가파른 웃음이었다가 궤도..

한줄 詩 2020.04.28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 조항록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뭉클해진 건 사월(四月) 탓일까 하얀 꽃잎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순정은 나를 놓치게도 한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관람하며 나의 분주(奔走)는 옛일이 되었다 제멋대로 정지해버린 그림자여 자주 그저께보다 멀리 기울어지는 나의 시선이여 인사동 수도약국 앞이었거나 해거름의 시청역 1번 출구였거나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근처 어디였거나 그날들에도 나는 기다림을 발효시키며 길거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을 기다리며 심란하기도 했으리라 길거리에서 누구를 만나 뒷길로 총총 걸음을 옮겼던 저 순간들 내가 닿지 않았던 날들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다 새삼 가슴이 흐린 건 이미 사라진 것들 때문일까 아직도 곁에 남아 있는 어느새 낡은 것들 ..

한줄 詩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