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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 백무산 시집

창비 시집을 좋아한다. 창비는 시집을 많이 내는 대형 출판사 중에서 가장 나와 궁합이 맞는 시집을 낸다. 그동안 참 많은 시집을 읽었지만 그중 창비 시집이 가장 많을 것이다. 내용이 가장 좋지만 다른 요소도 창비 시집을 좋아하는 이유다. 가격도 적당하고, 크기, 디자인, 종이질까지 창비 시집이 가장 무난하다. 크기가 너무 커도, 표지가 너무 딱딱해도 시집은 읽기 불편하다. 다른 책에 비해 시집은 여러 번 읽기 때문에 이런 요소가 더 중요하다. 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시집 세 권쯤은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춘문예 같은 화려하게 데뷰를 하고 장기간 잠수 타는 시인이 부지기수인 현실에서 시력 10년은 넘겨야 세 권이다. 아마도 백무산 시인은 시집 부터 만났을 거다. 초기 시..

네줄 冊 2020.04.23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엄마는 자꾸 도화사거리라고 했다 약국을 말할 때도 도화사거리 약국이라고 했고 도화사거리에 가서 두부를 사 오라고 했다 도화사거리 미용실 골목 안에는 여기인지 거기인지 모르는 분홍이 있었다 생선을 머리에 이고 생산 사세요, 외치며 수많은 골목을 걸었던 엄마의 몸에서 비린내 대신에 분홍의 냄새가 났다 도화사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었다 보이지 않는 도화를 찾으며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골목은 그저 복사꽃 한 잎의 두께만 했다 엄마의 안과 밖 그 사이에 놓인 분홍이 너무나 컸다 여기인지 거기인지 알 수 없는 분홍을 그냥 담고 있었다 분홍분홍 얘기하는 저 사거리 추어탕집 지붕 위로 연 이틀 비가 내렸고 엄마는 도화사거리라는 희미한 말을 남기고 가셨다 나는 사거리의 풍경이 내..

한줄 詩 2020.04.22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 - 이희인

이런 여행 책을 좋아한다. 어디 가면 풍광 좋은 유명한 곳이 있고 어디 가면 맛있는 식당이 있다는 흔해 빠진 여행책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이런 책은 보석처럼 빛난다. 여행도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때론 이렇게 사색하는 여행도 필요하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어릴 적 내가 다닌 학교도 공동묘지 터였다. 운동회나 소풍날 늘 비가 내린 것도 그 터에 살던 구렁이를 죽이는 바람에 저주를 받아 그런다고 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 또한 예전에 묘지가 많았을 것이다. 택지 개발은 도심이 아닌 주변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맞다. 나는 후생을 믿지 않는다. 죽으면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나는 화장해서 수목장을 원한다. 해부용 시신 기증 의사도 있다. 티벳의 풍장이 야만적..

네줄 冊 202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