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입자 허(虛)씨 육형제 - 황원교

마루안 2020. 4. 12. 18:27



세입자 허(虛)씨 육형제 - 황원교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에는 허씨 육형제가 산다

허전한, 허망한, 허무한, 허황한, 허송한, 허탈한

같은 돌림자를 갖고

내 심장의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사는

철면피 육형제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철저한 에고이스트들

걸핏하면 나의 눈물을 쏙 빼거나

절로 한숨짓게 만드는

쌩 날건달들이다

명색이 집주인으로서 철도 들만큼 들었지만

인내심은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산 낯짝 두꺼운 놈들에게

수시로 방을 빼라고 닦달을 해보지만

여전히 들은 척도 안 하는

참으로 뻔뻔한 세입자들, 허씨 육형제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은

어느덧 내가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꼰대가 되어 간다는 사실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봄비 내리는 삼천포 앞바다



지나온 길은 왜 아련하고 눈물 나는 것일까

지나온 시간은 왜 그립고 아픈 것일까

척후병처럼 드문드문 서 있는 섬들은

팔과 어깨로 단단히 스크럼을 짜고

켜켜이 몰려오는 해풍과 파도에 맞서고 있다

오후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 방향으로

열쇠 구멍 빠져나가듯 위태로이 떠가는

고깃배 한 척

파도에 온몸 부딪히며 푸른 멍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삶은 항상 위태로운 것 아니,

날마다 고해(苦海)에서 울렁거리는

뱃멀미를 참아내는 일

그대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한다면

절대로 잠들지 않는 삼천포 앞바다에 서보라

아쉽고 그리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되고

출렁거리는 삶은 수평선 너머를 꿈꾸게 한다

다만 숨을 멈추게 될 그날까지

저 파도들처럼 쉼 없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

길 가던 작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젖은 날개를 털며

불어오는 해풍에 파르르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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