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화면 조정 시간 - 이성목

마루안 2020. 4. 12. 18:22



화면 조정 시간 - 이성목



그때 세상은 얼마나 지루했을까


할 일 없는 오후가 긴 하품을 하며 옆으로 누워있었다

약간의 떨림과 홍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언제나 채널은 내가 바라보는 반대 방향으로 휙휙 돌려졌다

다 똑같아요 뭐 별거 있겠어요 잡음처럼 지지직거렸으나 

무엇이 시작되기 전, 지루한 화면은 계속되었다


어긋나 있는 간격과 중심을 미세하게 다 조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붉고 푸름의 적당한 중간, 검고 흰 간격의

적당한 자리를 잡고 살아봐야 아는 삶이 있다

잘 맞추었다고 기다린 배우의 얼굴이 너무 붉어

다시 푸른색을 찾는 동안 드라마는 막장에 이르기 일쑤다

처음부터 맞추어놓고 살거나 어긋나거나

어떻게든 끝나게 되어있는 것이 있다 끝이 나야만

길고 긴 밤이 본격적으로 드라마틱해지는 것이다

늦게 온 당신도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잘 맞추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돌려볼 채널도 몇 되지 않는 나였다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다



*시선집, 세상에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 천년의시작








괘종시계처럼 - 이성목



되돌아오겠다는 맹세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만 가는 시간의 노역자들

정시마다 전생에서 이승으로 나는 태어나고

정각마다 이승에서 더 먼 곳으로 태어나는 나는

언제쯤 당신에게 이를 수 있을까요

몇백만 광년을 돌아서 이제 막 고드름 끝에 도착한 햇살조차도

만나서는 그저 울기만 하는 봄날

한 번은 어깨, 한 번은 무릎

옷깃을 자꾸 스치기만 하는 우리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더 가고

가만있으면 한 걸음 덜 가는 곳에서 우두커니 멀어지는 우리

그 사이에서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도 내리는 것이니

굳은 몸의 간격을 좁히지 못합니다

둥근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신이 흔들리는 시계불알을 꽉 쥐어줄 때까지






*시인의 말


어떤 연애의 일

그 어떤 사랑의 일

생의 많은 일들이


'모른다'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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