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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 윤의섭 시집

윤의섭 시인을 알게 된 건 언제였을까. 아마도 네 번째 시집인 였지 싶다. 싶지라고 하는 것은 이 시인을 뒤늦게 알았고 그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정서가 나와 너무 닮았다는 소름에 일부러 멀리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또 나의 시 읽는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고 중구난방인 것도 한 이유다. 어쨌든 가능한 멀어지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에 필사해 옮겨 논 그의 시가 꽤 되는 걸 보면 윤의섭 시에 대한 끌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수지에 빠져 죽은 내 친구 몽연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시를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기보다 아껴두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누군가 슬픔도 아껴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 전에 발표한 그의 시..

네줄 冊 2020.03.30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아비께서 강조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되어라. 그것 하나만 지켜도 생을 지킬 수 있으리. 그러곤 덧붙였다. 책상을 바르게 정돈하라. 그것이 어지러워선 안 된다. 그것 하나만 실천해도 모두가 반듯한 사람으로 기억하리. 귀에 못 박힌 이야기. 말씀은 그뿐이었지만 소년은 믿음이 부족했다. 그것의 일 푼조차 새기지 못했다. 때는 늦었다. 책상은 어질러졌고 늦도록 먼 땅을 떠돌고 있다. 눈물이 그칠 새 없다. 여전히 울고 있는 소년, 어떻게 해도 그를 달랠 길 없다. 그러니 내 안에서 울도록 계속 놔둘 참이다.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시와반시 노안(老眼) - 이학성 그가 바뀐 건 다른 인과로 보긴 어렵다. 단지 세월이 부친 경이로운 힘을 받았을 뿐, 그걸 붙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

한줄 詩 2020.03.30

때 늦은 낫질 - 최정

때 늦은 낫질 - 최정 긴 폭염에 갇혀 밭둑 낫질은 엄두도 못 냈다 때 늦은 낫질은 힘에 부친다 단풍이 발자국을 찍으며 성큼성큼 한 걸음씩 내려오는 가을, 계곡 아래까지 가을빛이 그득하다 심장의 피를 뽑아 마구 뿌려 놓은 것처럼 붉은 단풍이 발길을 잡아끈다 낫을 던지고 아예 밭둑에 앉아 버렸다 야속하게 그리 서둘러 붉어질 일이냐 그리 아름다운 비명 지를 일이냐 첫눈에 물들어 잊히지 않는 사랑도 있더라 *시집, 푸른 돌밭, 한티재 빛 - 최정 골짜기 끝에서 환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홀로 늙어가도 서럽지 않을 만큼 아늑했다 첫해 농사를 짓고서야 알았다 환한 빛의 정체는 밭 전체를 덮었다 노랗게 마른 바랭이 풀 초보 농부를 비웃듯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집요하게 밭을 점령해 갔다 뽑다 지쳐 콩밭이 아예..

한줄 詩 2020.03.29

꽃구멍 - 이봉환​

꽃구멍 - 이봉환 ​ 우리 눈에는 그저 언젠가 때가 되면 피는 것이겠지만 동백에게는 얼마나 많은 힘이 끙, 끙, 필요했던 것일까 가지 끝의 여린 눈으로 꽃잎을 밀어내려 애쓴 흔적이 꽃봉오리 붉음에 스며 있네 때가 되면 우리 마음에도 봄이 오가고 또 당연히 그러는 것이겠지만 저들의 삶은 저리 안간힘이네 겨우내 동백은 잠 한숨 못 잤을 것이리 푸르던 잎이 거뭇거뭇해진 것 좀 봐! 똥 누듯 힘쓰느라 시퍼레진 저 낯빛을 좀 보라구! 어머니에게서 내가 나왔네 그 구멍들에서 나온, 너무나도 커다랗게 자라버린 저잣거리의 저놈들을 좀 봐! 밀어내느라 애쓸 만한 저 꽃들을 좀 보란 말이야! *시집, 응강, 반걸음 내 귀하고 늠름하고 어여쁜 - 이봉환 어쩌다가 내가 나로 태어나서 어느 곳을 흐르다가 한 귀한 여자를 만나고..

한줄 詩 2020.03.29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밤새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서둘러 낯을 씻는다. 아직은 이른 봄, 시린 손끝으로 어젯밤 아내의 한숨 소리가 파고든다. 밀리고 쫓겨 올라앉은 산동네 높은 것도 복일까 해마다 올려달라는 월세금은 냉수 한 사발을 부르고 쫓기듯 쪽문을 나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골목마다 이른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웨딩샵 쇼윈도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눈꽃 같은 드레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침침한 눈으로 살펴본다. 아무리 셈을 해도 알 수 없는 숫자다. 칼 한 자루 날을 세워야 고작 삼천 원 오천 원인데 옷 한 벌의 가격만큼 날을 세운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아하! 여기는 강남이요 압구정이란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해도(海道) - 백성민 그의 하루는 칼을 가는..

한줄 詩 2020.03.28

어느 시인의 시에 대한 넋두리

오늘날 시의 효용성과 가치를 따지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을 테다. 시가 돈도 밥도 명예도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공작이 펼친 깃털이 아름답다고 굶주린 자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시는 공작 깃털과 다를 바 없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한 줌의 언어는 무력하고, 무력하고, 무력할 뿐이다. 밤과 바다, 무덤과 아침 이슬, 나뭇잎과 뿌리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누설하는 시가 식탁 위 후추통보다 더 쓸모없다는 게 중론이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섬기는 시가 현실의 공리적 필요에 부응하지 못함을 부정할 수 없다. 시는 굶주림, 전염병, 인종청소, 전쟁, 폭력, 이념 갈등 같은 세상의 부조리와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는 끊임없이 씌어져서 굶주린 새떼같이 독자를 찾아 날아간다. 시는 ..

열줄 哀 2020.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