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소식입니까 - 이은규

마루안 2020. 4. 16. 21:50



꽃소식입니까 - 이은규



꽃을 즐겨 그리다 쇠약해진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물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인가요


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편지 속 문장
유화라기보다 으깬 꽃잎에 가까운 그림들
그림 그리기란 온몸의 노동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귀가 아플 만큼 고요한 날
귀를 자른 그는 미친 듯이 웃는 것으로 한 계절을 앓았다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문득 도착한 곳
아직 들리지 않는 향기, 꽃이 없다
그늘로만 서성이는 발걸음 너머
누군가 저 다리를 건너가면 절정이 환할 거라는 귀띔


봄과 봄 사이


저만치 바닥을 나뒹구는 꽃숭어리의 절정
그렇게 가는 봄날
세상의 꽃소식인 것 같기도, 아닌 것도 같은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봄의 미안 - 이은규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는데,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했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봄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인간적인 한에서 이미 악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면
오래 바다에 귀기울이자
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그 무엇이어서
봄은 먼 분홍을 가까이에 두고 사라질 것


성급한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만든다
오래 이어질 기억투쟁 특별구간


멀리서 가까이서 분홍분홍 들려오는 밤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고 있을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선언이어야 할 것


봄을 닫기 전에, 닫아버리려 하기 전에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