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위로의 정본 - 심재휘

마루안 2020. 4. 11. 21:25



위로의 정본 - 심재휘



언듯언듯 라일락 꽃향기가 있어서
사월 한낮의 그 가지 밑을 찾아가 올려다보면
웬걸, 향기는 오히려 사라지고 맑은 하늘뿐이지
다정함을 잃고 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나올 때
열없이 열 걸음을 멀어져갈 때
슬며시 다가와 등을 어루만져주는 그 꽃의 향기


술에 취해 집으로 드는 봄밤이라면
기댈 데 없이 가난한 제 발소리의
드문드문한 냄새를 맡다가 문득 만나게 되지
곁에서 열 걸음을 함께 걸어가주는 그 꽃, 향기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숨어서 보고만 있는지
그저 어둠 속 어딘가의 라일락 나무


그리하여 비가 세찬 날
그 나무 아래를 우산도 없이 지나간다면
젖은 걸음을 세워 그 꽃나무 아래에 잠시 머무른다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향기를 배우게 되지
젖은 제 온몸으로 더 젖은 마음을
흠뻑 닦아주는 그 꽃의 향기
어디로도 흩어지지 않는 이런 게 진짜 위로지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입춘 - 심재휘



먼저 태어난 것이 먼저 죽는다는 이치가
간혹은 말할 수 없도록 간곡하여서
아버지는 소한 추위에
애절한 순리를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의 생전으로부터 아직은 가까운 입춘
이미 젖은 흙에 오늘은 비가 내리니
젖음과 또 젖음의 경계를 찾을 수가 없고
입춘이 겨울인지 봄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의 삶과 사후가 이직은 입춘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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