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 정덕재 시집

마루안 2020. 4. 10. 19:05

 

 

 

출판업에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간 동향 중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출판사가 바로 <걷는사람>이다. 개성 시대라서인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출판사가 많다. 시집 전문 대형출판사 못지 않게 걷는사람이 좋은 시집을 많이 내고 있다.

호시탐탐 읽을 만한 시집 없나 엿보다 새로운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이 시집은 제목부터 강렬했다. 그럴 듯한 제목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이 많기에 제목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집은 제목으로도 내용물로도 독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 시집이 네 번째 책이지만 정덕재 시인은 별로 안 알려진 작가다. 나도 첫 번째 시집 빼고는 읽지 못했다. 이전의 시에서 크게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연속극 보다가 다음 편이 궁금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을 제대로 읽었다. 시란 것이 빼어난 서정성을 깔고 자연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까. 쉬운 어휘로 쓸데 없는 군더더기 털어 내고 중년의 삶을 익살스럽게 때론 잔잔히 묘사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라고 마냥 가볍지는 않다. 위트 있는 문장과 촌철살인의 묘사에 무릎을 쳤다. 시인은 1993년에 등단했으나 아주 늦게 첫 시집이 나왔다. 방송국에서 시사프로 작가로 일하느라 시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가슴에 담고 살던 재능이 드디어 쏟아져 나왔을까. 공감 가는 시가 참 많다. 맞아, 나도 그랬어. 그런 생각 할 만하겠군. 이렇게 기막힌 표현이 있을까. 정곡을 제대로 찔렀군. 이렇게 능청스런 중년이 있나. 등 시를 읽으면서 느낀 감정이다.

말랑말랑하면서 달착지근한 시가 읽히는 시대다. SNS에 떠도는 싯구들 또한 단맛 나는 예쁜 문장이 대부분이다. 정덕재 시는 말랑말랑하지도 달착지근하지도 않지만 쉽고 간결한 싯구를 따라 가다 보면 저절로 시에 공감이 된다.

누구나 자신이 상식적인 사람이고 법도 잘 지키며 운전도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으로 옮겨서 악인이 되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 악인이 되기도 한다. 조금 겸손해져서 나도 누군가에게 악인일 수 있고 상대를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시에서 악인은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고 무기력한 선인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한 인생에서 시인은 조금 악인이어도 좋다. 착한 척하면서 시 안 쓰는 시인보다 시 잘 쓰는 악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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