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장 오래된 유적 - 이철수

마루안 2020. 4. 12. 18:40

 

 

가장 오래된 유적 - 이철수


지하도를 건너오다 앉은뱅이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초저녁, 짐승의 순한 눈을 닮은 사내
눈빛이 너무 시려 내 몸의 안쪽이 얼얼했다
어떻게 왔을까, 그 사내 끌고 온
따뜻한 길의 안부가 궁금했다

발도 길도 없는 속수무책이
죄인처럼 불려나와
허공에서 석고대죄 하는 입,
저렇듯 징글징글한 마려움의 피돌기가
반 토막의 육체로 물구나무서서
내 무심천을 건너오는데

속도로도, 관념으로도 통과할 수 없는
이 난감한 유적 앞에 서서, 나는
누란의 미이라같이 썩지 않은
어여쁜 가난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신성이
불민한 땅 위에 병처럼 번져
누대로 세습된 열렬한 종교 같은 것이어서
흰 사발같이 고요한 허기로
의연한 슬픔의 눈으로
엎드려 밥을 비는 것

저 육신을 업고 있는 큰 입은,
아마도
태고 적 우리 조상이 눈물로 지어놓은
천길 깊은 밥의 신전
가장 오래된, 견고한 유적일 터

오래 전에 도착한 개밥바라기별 하나가
엎어진 어둠 속에서 내 눈을 맞추고 있다


*시집, 벼락을 먹은 당신이 있다, 시와소금


 

 



낙화 - 이철수


잠을 흔들었던 땅울림에서 깨어나면 목련이 지는 소리
불면의 지형을 만들었던 낙화의 여진으로 밤새 뒤척이는 봄,

나는 꽃의 감옥이다.
날마다 빛을 가누고 서서 꽃을 피우면서도
단 한순간도 소멸을 거부했던 나의 불온한 뿌리들
어릴 적 하기식 국기마당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 부르던 애국가의 결의같이,
천지간 꽃대에 매달려 한정 없이 떠날 줄 모르는 나는 막 핀 꽃.

한 시대의 전신(轉身)은 자유낙하 하는 꽃잎같이
조밀한 시간이 선행하고 있다는 것을
목련이 다 지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높이에 집착하지 않고 다툼이 없는 낙화,
서로의 어깨를 다치지 않고
정연한 중력의 동심원에 몸을 놓을 줄 아는 질서
때를 쫓아 스스로의 무게를 버릴 때에야 비로소
가벼워지는 무욕의 법도를 나보다 먼저 꽃이 알고 있었다.

꽃마루 위에 서면 해 떨어지는 하늘길

낙하하지 않는 모든 집착은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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