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음 계절에서의 출근 - 안숭범

마루안 2020. 4. 10. 22:26



다음 계절에서의 출근 - 안숭범



지하철이 인연에서 늦다
장국영이 발 없는 새로 온다


어제처럼
그제만큼


조간신문은 후회보다 느리고
비둘기는 구름에서 멀고
행선지는 커피에서 녹고
괭이밥은 여름보다 빠르고
마지막 퇴근은 벌써 며칠 전이다


당신들에게서 태어난 한 시선이 죽으면
내일은 다른 노래가 유행할 텐데


이젠 다시 어디를 향해야 하나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종착역인 너도나도, 너도나도 역입니다. 내릴 때에는 차 안에 두고 내리는 미련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철도를 이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당신이라는 모서리 - 안숭범



우리는 점점 변온동물이 되었다
당신은 나의 모서리를 몇 개 더 만들었고
오로지 그 모서리를 감추기 위해
한 사연을 처음 보는 사연과 함부로 용접했다
무심한 눈송이들은 돌아다니며 사이를 만들었고
바람은 훼방 놓을 수 없는 거리를 청구했다
서로에게서 퇴근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고
누우면 천장무늬가 모든 원인을 각색했다
돌연 물려받은 가난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그러면 모서리들이 사라졌단 믿음으로
한동안 잡스러운 노래를 수집하는 집시나
도굴된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수험생이 되었다
당신은 무고한 사연들 안에 새로운 양식의 성(城)을 세웠고
낯선 윤곽의 모서리에 부딪쳐 보기 위해
또 나는 숱한 사이와 거리를 계측했다
장마가 끝나면 폭설이 오는 계절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남루한 기저(基底)가 되었다
서로에게서 서로의 부음을 얻어내기 위해
각자의 무덤 곁에 더 날카로운 모서리로 서던 날
우린 이제 죽음의 다른 경향으로 추서되었다


지금도 어느 사이와 거리에 서면
부를 때마다 다른 몰골의 유령으로 오는
당신이라는 아픈 모서리






# 안숭범 시인은 1979년 광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2009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 평론 최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티티카카의 석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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