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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가 없다 지나온 저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나이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지운 탓이다 살다 보면 옳다고 잘했다고 동그라미 쳐줄 수 있는 때 과연 몇 번이나 되랴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 대신 역정을 돋을새김 한다 주름이라는 명징한 장부에 *시집/ 파미르를 베고 누워/ 서정시학 모서리에 부딪히다 - 김일태 화장실 가다 침대 모서리에 정강이가 부딪혔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어 혼자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가며 자주 부딪히는 게 책상이나 식탁뿐만 아니다 일상의 각진 데에도 쉬이 부딪히며 잔소리 또한 많아진다 인지능력 떨어지고 건망증 심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아내는 학술적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섣부른 예단 때문이라고 여긴다 촉각이 뽀족할 때는 그런 일 없다가 왜..

한줄 詩 2020.11.01

새의 운명 - 백무산

새의 운명 - 백무산 알에서 깨어나 처음 거두어준 손길을 어미로 알고 일생 한 사람을 따르는 새들이 있다지만 태어나 누구보다 일찍 내 곁에서 울어준 새 한마리를 나는 어미로 따르고 있네 홀로 깨어나던 백색의 여름 낮 현기증에 눈도 뜰 수 없던 그 새하얀 마당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쟁쟁 내 귀를 파먹으며 울던 새 하던 일도 놀던 일도 다 털고 따라나서게 하던 그 울음소리 그를 따라 험한 곳으로 가파른 곳으로 다리가 부서지고 피투성이 되기도 했네 내게 젖꼭지 대신 좌절을 물려주고 안아주던 대신 버려졌음을 알게 했네 날개도 발도 낳아주지 않았고 언제나 내게 허기를 물려주던 새 견딜 수 없어 그를 떠나려고 했네 모든 불행을 안겨준 그 소리에 귀를 막았네 그러나 잠시뿐 어느날 문밖에 그 소리 찾아왔네 나의 어린 ..

한줄 詩 2020.11.01

커피 한잔 할까요? - 허영만 만화

나는 영국에서 꼬박 14년을 살았다. 햇수로는 15년이다. 영국에 살면서 맛을 알게 된 음식들이 있다. 치즈, 와인, 초콜릿, 커피, 그리고 빵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커피 외에는 거의 접하지 못했거나 먹어도 드문드문 맛보는 정도였다. 빵이야 생존을 위해 먹다가 맛을 알게 되었으나 다른 것들은 그 곳 문화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것이다. 영국에 사는 동안 특히 와인과 치즈에 빠져 살았다. 안 먹는 날이 드물 정도로 거의 매일 먹었다. 저렴한 와인 위주로 마셨지만 말이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와인과 치즈가 엄청 싸다. 와인뿐인가. 빵, 우유, 달걀, 육류, 과일, 야채 등 기초 생활 물가는 영국이 한국의 절반 값 정도다. 특히 양파나 감자, 당근 값은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신..

네줄 冊 2020.10.30

슬픈 축제 - 김종필

슬픈 축제 - 김종필 사랑은 언제나 온유함을 손가락으로 그려내는 그들 사이를 막고 있는 무수한 벽을 우렁찬 박수로 깨뜨려야 하지만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다 눈으로 듣는다는 것이 마냥 슬프다 손으로 말하는 그들은 결코 울지 않는다 점점 눈이 커지는 춤과 노래 십자가가 사랑이 아니거늘 세상을 등지지 못하는 꽃들이여 내 멀쩡한 다리가 부러지도록 목발을 던져라 일그러진 얼굴에 침을 뱉어라 체념을 중심으로 도는 무대 위에 스스로 꽃이 되어라 남들이 기쁘게 웃으면 얼굴이 왜 차갑게 일그러지는지 남들이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울 때 가슴이 왜 얼어붙는지 말할 수 없음에 볼 수 없음에 걸을 수 없음에 결코 온유한 사랑을 구걸치 않는 맹세 저마다 타고난 멍에가 눈부신 꽃이 되리라 *시집/ 무서운 여자/ 학이사 마음이 아픈 ..

한줄 詩 2020.10.30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한때 저녁이 있었다, 시침이 덜컥, 덜컥 움직여 기울어간 어느 시간이 아니고, 석양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산자락을 향해 내쳐 달려들 때 두려움으로 염소들의 동공이 더 커지기 전에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런 저녁이었다. 밤나무에 올라 나무를 흔들어 밤을 터는데, 동생들이 떨어지는 밤송이를 피하며, 조금 있으면 어둠이 곳곳에서 버섯처럼 돋아나 떨어진 밤송이를 주울 수도 없다고 소리치던 그런 저녁이었고, 들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던, 생쑥을 잘라 모깃불을 피워 올리던, 그런 저녁이었다. 한때 저녁이 있었으나, 그 저녁이 오래 가리라고 믿었으나 이제 저녁은 가고 없고, 모깃불 연기도 밤송이의 낙하도 멈추었다. 한때의 저녁이 지금 스며들고 있다. 석양이 와서 말하길, 수십 ..

한줄 詩 2020.10.30

지는 사랑 - 권혁소

지는 사랑 - 권혁소 낡아보니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만큼만 사랑을 할 뿐 그런 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헤엄치기를 마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대에게야 말해 뭣 하겠는가 사랑을 잃고 시를 얻다니, 이런 행위가 삶을 경외하는 마지막 자세라고 슬픈 자위를 해보긴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휘파람을 불어주는 일도 버겁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 저문다 숨자, 어느 숲에든 몰래 들어가 조용한 바람에도 격하게 이파리를 떠는 관목(灌木)이라고 되자, 그대와 나 비록 실패하는 사랑에 매진했으나 아직 세상엔 못다 한 사랑이 많이 남았으니 사랑이 진다고 싸움을 부를 일만은 아니다 저..

한줄 詩 2020.10.30

당신은 내 국경이다 - 김대호

당신은 내 국경이다 - 김대호 내 인생에 필요한 무엇 하나를 얻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투자했다 비효율적 투자였다 아플 때 바로 쓰러지는 일은 효율적이다 멀쩡하게 살면서 중요한 구조는 다 쓰러져 있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 내 몸의 체적에 인접한 곳 국경이 있었다 당신이 내겐 국경이다 모국어를 버리고 국경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말을 더듬었다 국경을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어떤 연애도 내 안에 번지는 산불을 진압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낯선 나라에서 온 그대가 국경이 되어 나와 누군가를 구별하기 힘든 둘레에다가 굵고 깊은 금을 그었다 나는 그 국경 근처 비효율적인 몸짓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내 현재가 될 때까지 어눌하지만 지속적인 신호를 보냈다 당신이 내 암호가 되고 내가 국경을 넘는 날 강의 수위가 낮아졌..

한줄 詩 2020.10.29

공명음 - 박미경

공명음 - 박미경 문을 닫은 지 이십 년 훌쩍 지난 정미소 환삼덩굴 덮어쓰고 도깨비 풀밭에 주저앉았다 한 뼘은 족히 넘는 벨트가 바닥에서 천장으로 흐룰흐룰 몇 바퀴 돌고 나면 소에 떨어지는 물처럼 졸졸 포대기 속으로 흰쌀이 흘러들었다 나무 소리도 쇳소리도 아닌 음 귀를 막고 올려다보면 엉성한 양철지붕과 시멘트벽 사이 활모양의 틈으로 먼지는 반짝이며 날아가 햇살이 되었다 늦가을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복작거리며 옆 작은 방앗간에서 쌀가루 고춧가루를 빻기도 하던 정미소에는 텔레비젼도 있었다 세상일에는 꼭 절정이 있어야 했을까 강가에 놀러 갔던 정미소 아들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삼십 리 밖에서 발견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 살기 싫은 아픔 존재한다는 것을 그해 정미소 벽 담쟁이 붉게 물들어 접근금지 목책을 그으며 ..

한줄 詩 2020.10.29

태양계 가족 - 조우연

태양계 가족 - 조우연 중심에 엄마가 있었고 영원한 빛에너지이며 생명의 근원이었다. 절대 꺼지지 않을 우리 모두의 태양. 태양 가장 가까운 궤도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오빠는 자신의 불안정한 운행에도 딸린 위성 셋을 달고 태양을 돌고 있다. 1억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이런저런 사고를 치던 나를 두고 탄생 시기의 부적절성과 타고난 대기 성분의 부조화 진단을 내린 적이 있으나 지금도 나는 삐따닥한 기울기로 나만의 궤도를 돌고 있다. 술 마신 날엔 거꾸로 돌기도 한다. 서로의 중력에 못 이겨 맞물려 돌고 있는 남편과 나, 광활한 우주에서 부부의 연이 결코 가볍지는 않겠으나 떠돌이별의 근원적 궤도이탈 갈망을 이해하는 게 좋지 않겠나. 광원도, 마땅한 행성도 되지 못하고 숫자로 명명된 아버지는 경로당과..

한줄 詩 2020.10.29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 안상학 시집

안상학 시인의 시집이 나왔다. 그간 시집 내는 주기를 알기에 조만간 나오겠지 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 시집도 실천문학사에서 나올 거로 봤는데 이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출판사는 이름도 특이하지만 좋은 시집을 많이 낸다. 시집도 인연이라는 것이 있어서 찾아 나서야 연결이 된다. 출판사 걷는사람과는 비교적 연이 잘 닿는 모양이다. 안상학 시집이 여기서 나온 스물일곱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부터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첫 인연을 못 잊는 성격 탓이다. 그러나 출판사가 시기에 맞춰 시인 선정을 잘 하기에 이런 인연도 생긴다. 누구의 추천이나 광고는 참고만 할 뿐 스스로 찾아 나서 책을 고른다. 안상학 시집은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기다렸던 시집이기도 하거니와 평소 그가 어떤 시를 쓰는지 알고..

네줄 冊 2020.10.28